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0-06-18 01:11:09 IP ADRESS: *.12.6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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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 근육 위로 땀을 뿜으며
제주올레 제12코스 무릉~용수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지구촌 전체가 월드컵에 환호하고 있다. 나 역시 월드컵의 광팬이다. 축구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인류 역사상 최강의 조직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로마교황청도 아니고 볼셰비키도 아니다. 바로 국제축구연맹(FIFA)이다. 도대체 그 무엇이 축구를 세계 최강의 오락으로 만드는 것일까?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다. 나의 답변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것이 가장 육체적인 게임이기 때문이다.”

월드컵 경기를 들여다볼 때 나를 가장 흥분시키는 것은 그 ‘육체성’이다. 물론 축구는 대단히 지적인 게임이다. 하지만 축구에서 가장 빼어난 장면들은 전력질주, 몸싸움, 팽팽한 근육, 놀라운 몸놀림, 쏟아지는 땀과 피 등으로 구성된 ‘육체적인’ 순간들이다. 축구를 보면서 우리는 원시적인 동물성을 되찾고, 그 분출되는 에너지에 환호하는 것이다. 빼어난 축구선수들을 볼 때 나는 언제나 이렇게 감탄한다. 육체는 아름다워라.

제주올레 혹은 모든 걷기 여행의 매력은 그것이 지극히 ‘육체적인’ 길이라는 것이다. 잔머리로 돌파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시뮬레이션이란 없다. 그저 온몸의 뼈와 근육을 움직여 자신의 힘을 쏟아 부은 딱 그 만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시인 김수영의 표현을 어거지로 빌어 오자면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걷기 여행의 매력이고 제주올레의 본질인 것이다.

무릉에서 용수에 이르는 제주올레 12코스를 걷는 동안 내가 특히 더 ‘육체성’에 주목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동행인 때문이다. 사운드 엔지니어인 오명록은 심산스쿨을 대표하는 바이시클 라이더요 MTB(산악자전거)맨이다. 12코스에 합류하기 이틀 전에 도착한 그는 첫날 홀로 자전거를 타고 1100고지를 넘어 제주도를 종단했다. 둘째 날도 제주도 해안도로를 마치 속도 경기하듯 내달은 그는 이미 지칠 만도 했건만 여전히 쌩쌩했다. 검게 탄 근육이 잔뜩 긴장한 채 어서 출발 신호가 울리기만을 잔뜩 기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제주올레에서는 모든 동력 이동수단들을 배제한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등의 통행을 제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전거라면 사정이 다르다. 자전거라는 용어 자체가 ‘자가 동력으로 움직이는 차’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제주올레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계곡을 이리 저리 헤쳐 나가고 오름에 오르는 그 길을 자전거로 통과하리라 작정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명록과의 동행은 흥미로왔다. 자전거를 타고 제주올레를 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즐거운 일일까 괴로운 일일까 이도 저도 아닌 뻘짓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구간에 따라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들쳐 업고 가야 된다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기만 한다면. 무릉에서 녹남봉으로 향하는 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그 길에서 ‘논’을 발견한 것은 의외의 즐거움이었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지방 여행을 할 때 마주치게 되는 가장 평범한 풍경은 논이다. 그런데 왜 제주에서는 그 평범한 논이 ‘이채로운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전적으로 제주도의 토양 때문이다. 배수성이 너무 좋아 ‘물을 대는 논’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덕분에 일행은 ‘물을 댄 논’이라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 앞에서 저마다 사진 찍기에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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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사이를 통과할 때 오명록의 자전거는 그의 어깨 위로 올라간다. 사실 숙련된 MTB 선수에게 논두렁 달리기란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다. 다만 소중한 남의 재산에 행여라도 폐를 끼치지 않을까 저어하는 고운 마음 씀씀이의 결과일 뿐이다. 산정에 원형 분화구가 있는 녹남봉에 이르자 드디어 바로미터를 잴 때가 왔다. 자전거를 타고 녹남봉에 오를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다. 오명록이 이를 악물고 땀을 뻘뻘 흘리며 페달을 밟는다. 결과는? 가뿐한 성공이다. 심지어 그는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다면 그 길을 두 번 오르내린다. 낑낑대며 올라가는 모습도 보기 좋지만 놀라운 속도의 다운힐 역시 멋지다.

녹남봉을 지나 다시 마을길로 접어들자 모두의 탄성이 나온다. 한국이 낳은 세계 골프계의 기린아 양용은의 생가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생가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으리으리하거나 삐까뻔쩍한 대저택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의 생가는 제주 어느 마을에 가도 만날 수 있는, 너무 소박하다 못해 빈한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는, 그런 작고 초라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가슴 한켠을 묵직하게 누른다. 여기 제주도의 가난한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있다. 그가 최악의 조건들을 모두 물리치고 의연히 일어나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섰다. 그야말로 정신의 승리요 육체의 찬가라 아니할 수 없다.

12코스의 2/3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수월봉에서의 조망은 가슴을 툭 트이게 한다. 그 정상에 서서 눈 아래 펼쳐져 있는 바다의 풍광들을 바라보자면 수월봉이 고작해야 해발 77미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주변의 아무 것도 시야를 가로막지 않아 마치 고층빌딩 옥상층의 파노라마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듯 거침없이 한 바퀴를 돌아보면 차귀도, 죽도, 눈섬, 당산봉, 산방산, 한라산이 모두 바투 코앞에 있는 듯 하다. 12코스의 하이라이트는 그 이후로 이어지는 엉알길이다. 절벽 아래 위태로운 곡선을 그리며 나아가는 이 길은 오늘 하루 땀 흘린 육체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이쯤에서 끝나나 싶던 코스는 자구내 포구로 접어들면서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마치 깃발처럼 너울대는 반건 오징어들의 향연을 만끽하다가 당산봉으로 접어들면 다시 숲길과 산길이다. 그 정상에는 ‘새들이 많은 절벽’이라는 뜻의 생이기정이 기다리고 있다. 생이기정에 서서 바라본 차귀도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때마침 노을이 비껴 있었다. 내가 제주도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노을들 중의 하나다. 당산봉을 벗어날 즈음 파도가 깎아놓아 마치 조각품처럼 형성된 거대한 절벽을 만난다. 그곳에 퍼질러 앉아 부딪히는 파도 소리와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한 동안 묵상에 잠긴다.

12코스의 끝은 용수포구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신부인 김대건이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던 중 표류하다가 도착했다는 항구다. 그 앞의 난전에서 반쯤 말린 오징어를 판다. 일행들과 둘러 앉아 오징어를 찢고 맥주를 들이키며 오늘 하루의 행복을 만끽한다. 땀 흘리고 걸으니까 너무 좋지? 그럼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 너무 아름답지? 말이라고 하세요? 기분 좋게 이어지는 술 취한 대화는 끝이 없다. 혀가 꼬인 채 계속되는 그 모든 대화들의 결론은 단순하다. 현세는 살만하다. 육체는 아름답다.

[img3]

[제민일보] 2010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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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록

2010.06.18 10:00
*.74.16.178
민망하여 얼굴을 못들겠습니다. 샘( __) 갈수록 떨어지는 체력, 축적되는 지방, MTB 맨이 민망하기 그지없네요. 어제는 영화인집회에 가느라고 영진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었는데 너무 힘들더라구요..중간 중간 쥐도 나고.. 나이를 먹은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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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10.06.18 14:16
*.110.21.44
명록 그렇지? 나이를 먹는 거야...ㅋ
본문 중에 오명록(애인구함)이라고 써줄 걸 그랬나...?ㅋ

최상식

2010.06.18 14:38
*.133.10.24
모든 올레길을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생이기정 바당길에서 바라다 보는 차귀도의 노을이란...^^
완전 감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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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록

2010.06.19 00:08
*.234.93.182
샘의 제자사랑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TT..광고보다두 소개팅으로 해주심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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