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1-05-03 15:28:42 IP ADRESS: *.224.135.118

댓글

12

조회 수

3874




[img1]

...그리고 올레는 계속된다
제주올레 18코스 산지천~조천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이 책 [아침 첫비행기 타고 훌쩍 떠난 제주올레 트레킹]의 모든 출판 준비가 끝났다. 이제 다음 주면 햇수로 3년을 끌어오던 이 책의 긴 여정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된다. 하지만 인쇄기를 막 돌리려던 순간,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얄궂은 혹은 반가운 소식 하나를 전해온다. 제주올레 18코스를 2011년 4월 23일 개장한다는 것이다. 반갑다. 본래 2010년 가을에 개장할 예정이었는데 뜻하지 않았던 구제역 파동으로 무려 반년 넘게 연기되었다가 이제야 문을 여는 것이다. 얄궂다. 김진석과 나는 또 다시 아침 첫비행기를 타고 훌쩍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아침의 제주공항에서 우리를 맞아준 것은 신명희였다. 그녀는 오늘 하루 우리와 함께 18코스를 걷기 위하여 직장에 휴가를 냈다. 선수들끼리는 합의가 빠르다. 우리는 제주시내 시너스 제주(구 아카데미극장) 앞에 있는 미풍해장국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기로 전격 결정한다. 이 집 특유의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해장국을 떠먹으며 작전을 세운다. 신명희는 우리를 산지천 입구에 떨구어 주고는 일단 귀가했다가 다시 합류하기로 한다. 차를 가지고 움직이기에는 동선이 애매할뿐더러 허겁지겁 나오느라 짐도 제대로 못 챙겨왔기 때문이다.

산지천 입구에 못보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7코스의 종착점이자 18코스의 시작점에 제주올레가 새로 만들어 세운 표지석이다. 제주올레의 상징인 파란색 간세가 그 코믹한 코를 바다 방향으로 쫑긋 세운 채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한다. 전에도 이 길을 걸었던 나는 다리를 건너 산지천 건너편으로 간다. 올레길과 평행선을 그으며 진행되는 이 길에는 제주와 산지천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며 조형물들이 즐비해 있으니 한번쯤 걸어보기를 권한다. 산지천 끝의 중국피난선박물관에서 오른쪽으로 발길을 틀면 다시 제주올레길과 합류한다.

산지천을 걸으며 예전에 이 길을 함께 걸었던 이를 추억한다. 제주여객터미널을 지나치며 예전에 이곳에서 출발했던 추자도 여행을 떠올린다. 이제 제주의 어느 곳을 지나쳐도 살가운 추억 한 가닥쯤은 길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 역시 제주올레의 힘이다. 사라봉 오르는 길에 접어들자 김진석의 카메라 셔터가 바삐 움직인다. 앞서 걷는 아가씨들의 늘씬한 다리가 멋진 실루엣을 만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 입은 품새며 걷는 방향으로 보아 오늘 하루 종일 우리와 함께 갈 아가씨들인 것 같다. 사라봉 정상에서 도둑촬영(?)을 접고 간단한 수인사를 나눈 다음 아예 대놓고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한다. 뜻밖에도 두 아가씨 모두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겠다며 활짝 웃어준다.

[img2]

사라봉과 별도봉은 제주시가 자랑하는 두 개의 오름이다. 오늘따라 날씨가 놀랍도록 쾌청하여 비행기가 내려앉는 제주공항과 그 너머의 끝없는 바다와 내륙 저 안쪽의 장엄한 한라산이 모두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사라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공원에서 신명희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네 명으로 불어난 우리 일행을 보고 혀를 내두른다. 아니 도대체, 두 분 선생님은, 고 짧은 시간에, 무슨 작업을 어떻게 하셨길래. 사실 작업이랄 것도 없다. 제주올레는 함께 걷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무장해제 시켜준다. 우리는 신명희가 집에서 내려온 원두커피의 향기를 음미하며 말문을 튼다.

1987년생 양혜선과 1988년생 김민서는 아나운서학원 동기생들이다. 그런데 그 아나운서학원이라는 곳이 재미있다. 바로 서울 신촌에 있는 봄온아카데미였던 것이다. 봄온아카데미와 심산스쿨은 5분 거리에 있다. 게다가 그 아카데미의 원장이자 두 아가씨의 지도교수인 성연미는 한때 심산스쿨 명로진인디반의 수강생이기도 하다. 이쯤 되니 화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두 아가씨 다 오늘 걷는 18코스가 생애 첫 번째의 제주올레라고 한다. 이 코스가 마지막 제주올레인 우리는 온갖 잘난 체를 하며 훈수를 두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별도봉체 갈림길을 돌아서자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샛노란 노지(인위적으로 조성되지 않은) 유채꽃밭이 펼쳐져 있는데, 인위적으로 구획된 제주 특유의 돌담들과 어우러져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천상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추상의 아름다움 밑에는 현세의 추악함이 가리워져 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곳이 바로 4.3사태때 모든 마을사람들이 몰살당한 곤을동 마을터였던 것이다. 깔깔대며 카메라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대던 것도 잠시, 모두들 갑자기 목울대가 울컥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다. 제주도의 유채꽃은 단지 관광객들 사진 찍으라고 피어난 노란색의 풍경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화북포구를 지나 별도연대를 빠져나갈 즈음 우리는 올레길을 잠시 벗어난다. 환해장성에 기대어 앉아 와인 한잔을 나누기 위해서다. 이런 종류의 봄 소풍에는 제격인 뉴질랜드 말보로산 소비뇽 블랑을 홀짝이며 걷기 혹은 산행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희 아버님 형제들이 모두 산행을 즐기시고,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한국산악회 고문이셨어요. 덕분에 엄홍길 대장님도 잘 알고요. 한국산악회 혹은 엄홍길이라면 내게도 아주 익숙한 이름들이다. 그럼 할아버님 성함이? 양짜, 두짜, 철짜 쓰세요. 나는 하마터면 와인을 마시다가 사래 걸릴 뻔 했다. 켁, 네가 양두철 선생님의 손녀딸이라고?

[img3]

한국등반사에서 가장 걸출한 클라이머(암벽등반가)를 꼽으라면 단연 김정태와 양두철이다. 두 사람은 일제시대의 백령회 시절부터 가장 빼어난 조선인 자일파티로 명성을 떨쳤다. 한국 암벽등반의 양대 메카라 할 수 있는 인수봉과 선인봉에는 이 두 사람이 개척한 바윗길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양두철 선생의 맏아들 양건웅 역시 당대를 대표하는 클라이머였다. 양혜선은 내가 그 집안의 바위내력(!)을 줄줄이 주워섬기자 오히려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마 그녀도 자신의 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위대한 등반가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너무 기분 좋았다. 한국등반사에 굵은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긴 인물의 손녀딸이 제주올레를 걷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할아버지 세대처럼 혹은 아버지 세대처럼 험준한 바위에 매달려 길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수직의 바위에서 길을 내던 시대는 가고 이제 수평의 대지에서 길을 걷는 시대가 온 것일까? 아무래도 좋다. 그렇게 세대를 거듭하며 우리는 나아가고 있다. 길은 그렇게 이어진다. 세대는 그렇게 연결된다. 제주올레는 그렇게 계속된다. 환해장성에 등을 기대고 눈 앞에 펼쳐진 한라산을 우러러 보며 젊은 세대들과 더불어 기분 좋게 와인 한잔을 나누던 이 날의 기억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제주올레 18코스는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제주시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 코스여서 그닥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는데, 실제로 걸어본 소감은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추천할만한 코스라는 것이다. 삼양검은모래해변을 지나 들어서게 되는 신촌 가는 옛길은 제주올레의 존재이유를 온몸으로 웅변한다. 18코스의 끝이 제주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시발점이었던 만세동산이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든다. 청삼(해삼의 일종)에 한라산으로 시작한 낮술이 코스를 마무리한 다음의 저녁 술자리까지 이어진 것도 당연하다.

내게 제주올레 18코스는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가진다. 이 코스를 마지막으로 이 책은 세상에 나간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 내 손을 벗어난 책은 이미 내 책이 아니다. 하지만 제주올레는 계속될 것이다. 18코스를 마지막으로 걸은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18코스로부터 제주올레를 시작하는 새로운 젊은이들도 있다. 그들과 함께 걸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리쿠르트가 안 되는 모임은 조만간 고여 썩기 마련이다. 추억과 회상만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난다. 하지만 제주올레에는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그들이 꿈을 꾸고 미래를 상상하는 한, 제주올레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img4]

[심산스쿨] 2011년 5월 3일

profile

심산

2011.05.03 15:36
*.224.135.118
...이 예쁜 아가씨들을 보고 싶은 사람은
담주 수욜밤 내 특강 시간에 심산스쿨로 올 것!^^

신명희

2011.05.03 16:32
*.99.151.65
책이 나와도 고민이네요~~
그간...제주도 '공직생활'의 전모가 다 들어날 껄 생각하니...허걱~
당장 끌려 올라가는건 아닌지...흑~~

'신모양', 'S모양' ...뭐 이런걸로 바꾸면 안될까요? ^^*

김주영

2011.05.03 17:35
*.98.10.226
사진반 수강중이라그런지..자꾸 사진만 보게된다..ㅋ

김진석

2011.05.03 22:48
*.12.48.191
심샘 고생하셨습니다.

최상

2011.05.03 23:39
*.182.96.144
18코스도 예쁠 것 같은데, 아가씨들이 넘 풋풋하고 예뻐서 자꾸 눈이 가네요^^
profile

명로진

2011.05.04 11:08
*.192.225.86
세상 참 좁네요. ^^
잘 읽었습니다.

서영우

2011.05.04 11:13
*.216.155.18
모든 책은 난산이군요.
교장선생님께서는 혹부리 영감처럼 어디선가 책을 그냥 쑥 뽑아내는 줄 알았거든요.

차무진

2011.05.04 11:26
*.129.42.22
캬, 와인맛도, 올레맛도 최고였을 것 같아요. 인연이라는 안주가 있었으니!!!!

최준석

2011.05.04 13:19
*.152.24.74
바빠죽겠는데 문자로 염장지르시고서는..ㅠㅜ
와인반특강신청은 정말 잘했네..ㅋ

신명희

2011.05.04 15:38
*.99.151.65
멍게와 청삼, 소라에 홍합탕 그리고 한라산! 정말 끝내줬다는...
보는 한라산도, 먹는 한라산도 최고! ㅎㅎㅎ

최상식

2011.05.26 12:49
*.133.47.124
아,저 틈에 저도 있었어야 하는데 ㅋㅋ

조영빈

2011.06.14 22:18
*.50.18.63
아..놓쳤다..ㅠㅠ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153 그래, 늬들 말이 다 옳아! 관리자 2006-01-09 29073
152 남아공항공 안에 달(들)이 뜨다 + 15 file 심산 2008-05-21 12375
151 할매의 절벽과 추사의 계곡 + 4 file 심산 2009-12-20 11366
150 길 위에서 놀다 + 10 file 심산 2009-05-13 7829
149 감악산에 다녀왔습니다 file 심산 2006-02-12 6606
148 그들보다 즐겁게 살자! file 관리자 2006-01-09 6432
147 송년특집 [명사들의 책읽기] 방송 안내 + 3 심산 2010-12-16 5360
146 식객 강헌의 전국맛집순례 일정 + 14 심산 2008-01-08 5140
145 심산이 찍은 발리 사진들 + 16 file 심산 2009-12-01 5096
144 문화재청 초청으로 북악산에 다녀왔습니다 file 심산 2006-03-18 4976
143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와인파티 + 10 file 심산 2006-07-29 4954
142 김희재, 천만관객이 사랑한 작가 file 심산 2006-01-30 4892
141 서지형 사진기자가 제 얼굴을 반쪽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심산 2006-01-22 4693
140 프랑스의 작업남녀들 + 16 file 심산 2010-11-02 4425
139 하찮음에 대한 경배 관리자 2006-01-30 4415
138 스크린쿼터를 누구 맘대로 줄여?! 심산 2006-01-27 4395
137 [한국일보]에 산악에세이 [산 그리고 사람] 연재를 시작합니다 심산 2006-03-01 4342
136 제주올레, 박물관에서 걷다 + 11 file 심산 2011-03-04 4314
135 딴지총수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 22 file 심산 2009-08-28 4279
134 기형도의 추억 + 22 심산 2009-03-08 4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