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5-28 00:54:42 IP ADRESS: *.146.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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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의 핏빛 카니발

츠카모토 신야 [동경의 주먹](1995)

 

도쿄의 평범한 보험 외판원 츠다(츠카모토 신야)와 그의 아내인 히즈루(후지이 카오리)의 집에 어느 날 불청객이 찾아든다. 츠다의 옛 친구인 고지마(츠카모토 코지)는 탄탄한 근육과 불쾌한 눈빛을 가진 정체불명의 사내다. 기이한 삼각 동거의 긴장이 높아질 즈음 고지마는 폭탄선언을 한다. "난 네 여자를 가졌어. 그녀도 나와의 관계를 즐기더군" 츠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지만 결과는 이미 내정되어 있다. 고지마는 가공할 위력의 펀치를 구사하는 권투선수였던 것이다.

그 단 한방의 주먹 때문에 츠다와 히즈루의 일상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급변한다. 유순한 샐러리맨이었던 츠다는 핏발 선 두 눈을 부라리며 권투 도장을 찾고, 무료한 주부였던 히즈루는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며 제 몸에 구멍을 뚫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츠다가 아무리 노력해도 고지마를 이길 수는 없다. 덕분에 그들의 육체는 언제나 피투성이다. 츠다는 링 위에서 온 몸의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히즈루는 엽기적인 피어싱에 중독되어 계속 자신의 몸을 학대한다.

츠카모토 신야 감독의 [동경의 주먹](1995)은 20세기말 사이버펑크 영화의 기념비적 명품이다. 사이버펑크라는 매혹적이되 복잡한 개념을 설명해내기에는 내게 주어진 지면이 너무 작다. 여기서는 다만 그것이 체제전복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만을 기억해두자. 덕분에 이 영화 속에 묘사되는 인간의 육체는 마치 쇳덩어리로 이루어진 기계처럼 보인다. 그들은 벽을 뚫을 만큼 강력한 주먹을 휘두르며 서로의 육체를 파괴하려는 죽음의 권투시합을 벌인다.

사이버펑크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즐기기가 버거울 것이다. 내용은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하고 표현은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다. [동경의 주먹]에 묘사된 권투는 스포츠가 아니라 필살기다. 과장된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현란하게 편집된 권투장면들이 하나의 악몽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나면 낯선 카타르시스의 몸을 떨게되는 것은 왜일까? [동경의 주먹]은 일종의 카니발이다. 그리고 모든 카니발들이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체제유지를 위해 억눌러왔던 모든 본성들을 마음껏 표출한다.

[한겨레] 2004년 3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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