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9-13 07:59:23 IP ADRESS: *.241.46.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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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디오니소스 축제
심산의 와인예찬(23) 남체의 모든 와인들(상)

히말라야는 나의 정신적 고향이다.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 서울 하늘 아래서 시시껄렁한 인간사에 부대끼며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모든 날들은 곧 뿌리 잃은 실향민의 삶에 불과한 것이다. 그곳은 나의 육체적 고향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새벽녘에 눈을 뜨고 해질녘에 자리에 눕는다. 그곳에서는 나약한 잡념들의 고리를 끊고 오직 팔과 다리의 모든 근육을 동원하여 걷고 또 걸을 뿐이다. 서울에서의 나의 육체란 피곤한 고기덩어리에 불과하다. 언제나 술에 찌들어 있으며 해뜰녘에야 겨우 눈을 감는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틈만 나면 히말라야로 달려간다. 타향사람들이 보기에 그곳에서의 삶은 고달프다. 하루 종일 걷거나 오르며 거대한 설산 너머로 시야를 던져보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곳이 고향인 사람들에게 그것은 가장 온전한 삶의 방식이다. 덕분에 나는 이따금씩 홀로 히말라야를 헤맨다. 때로는 두 세 명의 마음 잘 맞는 지인들과 함께 갔던 적도 있다. 여행 혹은 산행은 호젓한 일행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다. 아마도 내 살아 생전에 대규모 원정대의 일원이 되어 그곳을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하지만 인연의 실타래는 언제나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사정없이 풀려나가는 법이다.

수년 전의 일이다. 나는 한국등반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의 원정대에 선발되었다. 물론 내 어줍짢은 등반 능력 때문이 아니다. 나는 원정대의 ‘작가’로서 참여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세간의 숱한 화제를 뿌렸던 원정대였다. 죽은 산친구의 시신을 수습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세계등반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고, 그 과정이 너무도 험난해서 대원들 모두가 몇 차례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까닭이다. 나는 그 과정을 책으로 써냈고 그로써 내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했다. 그런데 또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 하느냐고? 나는 ‘책에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것이 시나리오가 됐건 에세이가 됐건 장편소설이 됐건 여하튼 나는 글을 써서 밥을 먹는다. 이른바 작가다. 그런데 작가인 내가 ‘글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조금쯤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이다. 나는 글을 믿지 않는다. 모든 글은 ‘오피셜 스토리(official story)'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소설로서 오피셜하고, 에세이는 에세이로서 오피셜하며,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로서 오피셜하다. 이것은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이런 사정은 개인의 일기나 블로그 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고 그것이 백퍼센트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너무도 순진한 사람이다. 일기 역시 제 나름의 방식 안에서 오피셜한 글일 뿐이다.

내가 썼던 원정대의 기록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오피셜한 기록이다. 실제의 원정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겪고 당했다. 그 중에는 결코 써서는 안되는 일도 있고,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는 일들도 있으며, 밝히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일들도 있는 것이다. 써서는 안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겠다. 그것은 무덤까지 가져갈 일이다. 여기서는 오피셜하지는 않되, 즐거운 마음으로 밝힐 수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생각이다. 여러 원정대원들이 그 이야기를 왜 기록에서 뺐느냐고 가벼운 타박을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원정대의 오피셜한 기록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다. 대신 이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쓰는 에세이에서는 한 자락쯤 풀어낼 만도 하다.

우리 원정대는 유쾌했었다. 잘 먹고 잘 놀았다. 초딩 수준의 인생 이해 혹은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재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진술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그토록 비장한 슬로건을 내걸고 원정을 떠났던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그렇게도 잘 놀았다니!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도 때로는 웃음꽃이 피고, 엽기 발랄 코미디를 보면서도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전쟁통에도 뜨거운 사랑의 결과로 아이가 태어나고, 모든 것을 다 가진 백만장자도 외로움 때문에 운다. 그것이 사람이다. 그것이 삶이다. 우리가 겪었던 고통과 공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다만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유쾌하게 잘 놀았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은 것뿐이다.

히말라야에는 밤이 일찍 찾아온다. 그러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것도 몇 분뿐이고, 쏟아질듯 아롱거리는 별들을 쳐다보며 감탄하는 것도 몇 분뿐이다. 그러면 대원들 중 몇몇이 슬며시 은근한 눈빛을 보내온다. 교장 선생님, 학교 안 열어요? 오해 없기 바란다. 원정을 다녀온 것은 심산스쿨을 열기 이전이었다. 그런데 교장이니 학교니가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교장 선생님은 내 별명이었고 학교란 내가 벌이던 카드판을 뜻한다. 나는 내 텐트에 자리를 깔아놓고 베이스캠프를 슬슬 돌아다니며 학교종을 친다. 어이 학교들 안 와? 공부들 해야지, 공부! 그러면 이마에 헤드랜턴 하나씩을 밝힌 학생들이 헤벌쭉 웃으면서 저마다 자신들의 텐트문을 열고 나온다.

처음에는 간단한 훌라부터 가르친다. 제법들 따라온다. 그러면 이제 포커다. 조금만 지나면 오디너리 포커는 너무 시시해진다. 그러면 이제 하이로로 들어간다. 하이로를 겨우 이해했다 싶으면 좀 더 복잡한 룰의 게임이 시작된다. 식스 투 컷 투 바잉 세븐 로 스트레이트 하이. 이쯤 되면 머리가 깨지기 시작한다. 자퇴생과 제적생 그리고 열등생들이 속출한다. 돈을 다 털린 녀석들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등반 장비를 저당 잡혀서라도 계속 학교에 오고 싶어 한다. 야, 너 그 그리벨 피켈 괜찮더라? 한 10달러 쳐줄까? 하이고 형 너무해, 그게 얼마짜린데...좋아 그럼 12달러, 싫음 말고! 밤 늦은 히말라야 캠프 안에서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올라야될 벽도 견뎌내야할 추위도 가족 몰래 써두고 온 유서도 잊는다.

[img2]

하지만 꼬리가 길면 덜미를 잡히기 마련이다. 내가 낸 학교가 연일 대성황을 이루고 제적생들이 속출하자 원정대장의 호출이 온다. 너 임마 밤마다 애들 돈을 박박 긁어간다며? 이 자식이 이게 산 밖에 모르는 순진한 애들 꼬셔가지고. 오피셜한 자리에서 그는 엄격하고 무서운 원정대장이다. 하지만 이렇게 텐트 안에 마주 앉아 있으면 편안한 형일 뿐이다. 형, 걱정 마, 내가 걔들 코 묻은 돈 따서 설마 인 마이 포켓 하겠어? 하지만 걔들도 가오가 있으니까 뽀찌를 줄 수는 없고...내가 남체로 내려가서 근사하게 술 한 잔 살께! 술 이야기가 나오자 원정대장의 낯빛에도 어쩔 수 없이 미소가 떠오른다. 야 근데 남체에 뭔 술이 있냐? 기껏해야 맥주 아니면 창(히말라야 민속주)이지. 내 목소리는 이쯤에서 가뿐히 한 옥타브를 뛰어오른다. 거기도 와인들 꽤 있던데? 내가 올라올 때 미리 쫙 둘러봤지!

남체(Namche, 해발 3,440m)는 쿰부 히말라야 최대의 산중도시이다. 에베레스트(Everest, 해발 8,848m)는 네팔과 티벳(중국)의 국경선에 위치해 있는데, 네팔 쪽을 통하여 에베레스트에 오르려면 반드시 이곳 남체를 통과해야 된다. 우리 원정대가 오르려 했던 루트는 티벳 쪽 베이스캠프를 통하여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길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남체를 통과하여 쿰부 히말라야에 머무르고 있는가? 고소적응을 위해서였다. 티벳 쪽 베이스캠프까지는 자동차로 진입할 수 있다. 덕분에 어프로치가 짧고 편한 대신 급격한 고도상승 때문에 고산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 그래서 네팔 쪽을 통하여 천천히 고소적응을 마친 다음 티벳(중국) 국경을 넘어 원래의 목적지로 향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원정대장으로부터 암묵적 추인(?)까지 받아놓은 상태이니 이제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우리는 고통스럽게 제게 주어진 임무들을 다 했다. 고도를 높이고 캠프를 건설하고 고산병 증세 때문에 꾸역꾸역 토하며 체력과 생명을 소진해나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도 해가 지고 나면 여전히 학교를 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밀크티를 한 잔씩 마신 다음 양치질까지 끝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붉은 고무봉지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핫팩을 하나씩들 꿰차고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등록금(!)을 모두 털어서. 이 모든 수업들은 남체에서 벌이기로 한 히말라야 디오니스소 축제를 위한 준비작업이었다<계속>.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9월 17일

조현옥

2007.09.13 09:04
*.62.89.4
갑자기 타짜 [원 아이드 잭]에 나왔던 '교장 선생님' 이 떠오르네요.ㅋㅋㅋ
삶은 본래 불행한 것이니 놀때라도 행복하자...^^

한수련

2007.09.13 14:30
*.235.169.165
일러스트 멋지긴 한데... 과장이.. 좀.. 특히 몸매. (순정만화주인공이야~~~)ㅋㅋ
마운틴 오딧세이를 다 읽고 책한권을 더 샀는데 그게 히말라야의 아들이었죠.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뛰어난 운율 따위는 없었지만..
내용도 깊고진한 인간의 정수와 삶의고뇌따위도 아니었지만..
그냥 덤덤하고 담박해서 좋았던 기억이 나요.
설악산에 갔을 때 그곳에 물, 나무들, 동물들, 새들이 모두 인간에게 덤덤해서 무척 놀랐었어요.
그래서 더 좋기도 했지만..

이 글은 산의 그 담박함에 선생님의 목소리처럼 한옥타브 높은 유희가 들어 있어서 더 맘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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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9.14 14:09
*.201.16.148
수련, 거의 사진에 가까운 일러스트로구만 웬 시비야...?ㅋㅋㅋ

임현담

2007.09.14 15:24
*.95.252.149
심산 샘, 참 맛깔스럽게 잘 써요^^
가암탄[감탄]!
profile

심산

2007.09.14 16:19
*.201.16.148
켁, 다른 사람도 아닌 임샘이 그런 말씀을...
맨날 임샘 홈피 들어가서 글 읽어보며 감탄하는 나는 어쩌라고...^^

강상균

2007.09.15 16:38
*.100.94.238
심산스쿨 히말라야 분교부터 세우셨던 셈이네요. :)

정경화

2007.09.19 10:48
*.96.222.1
2부가 기대됩니당... 또 어떤 멋진 와인냥들이 디오니소스축제에 불을 지폈을지..

김희자

2007.09.19 21:35
*.134.45.100
와...2부, 2부...(수련씨 말에 절대 동감.공감.)
profile

심산

2007.09.20 17:56
*.237.81.107
희자, 너도 수련과 나란히 묻히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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