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10-18 13:34:47 IP ADRESS: *.131.1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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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노역 끝의 달콤한 휴식
심산의 와인예찬(26) 호주 쉬라즈 래키

내가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외동딸을 낳은 직후였다. 이제 그 아이가 어엿한 단발머리 중학생으로 훌쩍 커버렸으니 정말 쏜살 같이 흐르는 것이 세월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이나 그 이후의 원정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도 많다. 아마도 대하소설 몇 권을 써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히말라야 초행길에 내가 고용했던 한 포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곱슬머리에 반짝이는 눈을 가졌고, 네팔 현지인치고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으며, 친절함이 지나쳐 때로는 아부처럼 느껴질 만큼 곰살 맞은 청년이었다. 녀석의 이름을 래키(Lackey)라고 해두자.

히말라야의 아침은 래키의 목 따는 소리로부터 시작된다. 굿모닝 사히브, 밀크티 오어 블랙티? 녀석의 목소리가 어찌나 경쾌하고도 큰지 더 이상 로지의 삐거덕거리는 침대에 누워서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로지의 문을 열어젖히면 눈부신 히말라야의 아침 햇살이 파고든다. 그리고 그 햇살을 불쑥 가로막으며 징그러운 함박웃음이 가득한 시커먼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 바로 래키이다. 이봐 래키, 아침부터 홍차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난 언제나 밀크티라고 몇 번을 말해줘야 돼? 녀석이 과연 내 핀잔을 알아들었는지는 의문이다. 다음날 아침에도 래키는 언제나 판에 박은 대사를 외쳐대곤 했던 것이다. 굿모닝 사히브, 밀크티 오어 블랙티?

포터라면 짐이나 지고 따라오면 그만이다. 더 이상의 언행은 과잉에 속한다. 하지만 녀석은 내 뒤도 아니라 옆에 바투 붙어 따라오며 끊임없이 혀를 놀려댄다. 저기 보이는 것이 사히브, 마차푸차레에요. 영어로 피쉬스 테일, 물고기 꼬리라는 뜻이죠. 우리의 성스러운 산인데 저 위에 여신이 살고 있어요.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녀석의 입을 다물게 하려 애쓴다. 이봐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너 저 산의 초등자가 누군지 알어? 영국산악인 윌프리드 노이스야. 하지만 실수였다. 녀석은 그렇지 않아도 큰 눈망울을 토해낼듯 부라리며 강력히 손사래를 친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저 산에는 아무도 못 올라간다구요! 더 이야기해봤자 내 입만 아프다. 나는 포기하고 내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녀석은 곧바로 다시 내 곁에 따라붙는다. 사히브, 저 산 이름 알아요? 마차푸차레에요!

래키는 마치 내 짐을 줄여주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굴었다. 사히브 물통도 내가 지면 안될까요? 사히브 파카도 나한테 맡겨요, 필요할 땐 내가 당장 꺼내줄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나는 녀석에게 맡긴 커다란 카고백의 무게를 가늠해본다. 지금도 만만치 않은 무게다. 나는 녀석의 행색을 위 아래로 훑어본다. 여기저기 구멍 나고 기운 여름바지에 새카만 발가락이 그대로 드러나는 슬리퍼 차림이다. 녀석은 그 행색을 하고서도 결코 로지에 들어오지 않는다. 얇은 담요 한 장만 두르고 마당의 나무 밑에 웅크리거나 기껏해야 주방 한 구석에 찌그러져서 잠을 청할 뿐이다. 이봐 나 이래봬도 등산에는 이력이 난 사람이야, 제발 신경 좀 끄고 멀찌감치 뒤에서 따라오라구. 녀석은 비굴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헤헤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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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과잉 충성은 트레킹이 다 끝나갈 즈음에야 그 목적을 드러냈다. 약속한 일당을 모두 다 지급해줬건만 내민 손을 거둬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기꺼이 그에게 보너스를 지급했다. 하지만 녀석은 산 위가 아닌 평지에 내려선 다음인데도 그 동안 전혀 안 하던 짓을 한다. 두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마구 춥다는 시늉을 해대는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 이 놈아, 어쩐지 내 파카에 잔뜩 눈독을 들이더라니. 사실 내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파카였다. 나는 이제 곧 따뜻한 남쪽 나라의 바닷가로 날아갈 것이다. 옛다 이 놈아, 아예 파카에다가 등산화까지 몽땅 벗어줄 테니까 네가 다 가져라!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적선이다. 아깝지 않게 던져주긴 했지만 마음마저 흔쾌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홀라당 벗겨가려고 그 동안 그렇게 곰살 맞은 척 했단 말이지?

그렇게 챙길 것을 다 챙긴 녀석이 뜻밖의 역제안을 해왔다. 자기가 보너스까지 두둑하게 챙겼으니 맥주 한 잔 사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행 들머리의 후줄근한 가게 앞에 앉아 미지근한 맥주를 한 병씩 땄다. 내가 맥주를 홀짝거리며 무심코 물었다. 너 영어솜씨가 아주 훌륭하던데 어디서 배웠어? 녀석의 대답이 뒷통수를 쳤다. 나 카트만두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어요. 나름대로 성적도 무척 좋아서 줄곧 장학생으로 다녔지요.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를 배운 것 없는 산골 무지랭이 청년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네팔 최고의 명문대학 출신이라니. 그런데 그런 엘리트 청년이 기껏해야 일당 몇 천원을 받고 쌩글쌩글 웃으며 그 힘든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니.

래키의 눈동자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 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요. 취직할 데도 없고 돈 벌 일도 없다고요. 당신들 눈에는 아름다운 관광지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끔찍한 삶의 터전이지요. 래키는 자신이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마오이스트들의 노선에 심정적으로는 동조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나라도 그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기꺼이 총을 들고 일어설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를 한국으로 데려가 줄 수는 없어요? 그렇게 묻는 그의 눈빛에는 애절함이 가득했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열심히 일해서 그 노동의 대가로 먹고 살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죠.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해요. 내게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묵묵히 시뻘건 고무다라이에 담겨 있는 미지근한 맥주 몇 병을 더 꺼내왔을 뿐이다.

래키와의 인연은 오래 지속되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그의 주소로 커다란 라면박스를 몇 개 보냈다. 헌 옷과 신발 따위가 가득 담긴 짐들이었다. 녀석은 그때마다 근사한 영어표현을 구사해가며 감사를 표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수 년 전 ‘히말라야 어깨동무’라는 후원단체를 결성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녀석의 고향마을에 도움을 주고 싶어 그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소식이 끊긴 것이다.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금년 봄에 뜻밖의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사히브? 나는 호주의 한 목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은 무척 고되지만 날씨는 끝내주고 주인집 사람들도 아주 친절합니다. 이곳에서 몇 년만 더 일하면 제법 큰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멋진 호주의 풍경을 당신께 선물로 보냅니다. 나는 호주의 소인(消印)이 찍혀 있는 그 멋진 그림엽서를 오래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img3]

래키(The Lackey)는 호주 남부의 킬리카논(Kilikanon)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100% 쉬라즈 와인의 이름이다. 래키란 우리 말의 막노동꾼에 해당한다. 와인 뒷라벨에 쓰여진 설명을 보면 특히 호주 현지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를 뜻한다고 한다. 라벨의 로고타입 역시 묵직한 작업용 부츠를 그려 넣어 어딘지 모르게 건강한 땀냄새 같은 것이 풍겨나오는 듯 하다. 결코 고급 와인은 아니고 중저가 와인인데 얼마 전 로버트 파커로부터 90점을 받아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와이너리 주인의 위트 넘치는 설명에 따르면 “고된 노역의 결과로 만들었는데 너무 싼 값에 내놓게 되어” 래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래키를 마시면서 래키를 생각한다. 헬로 래키, 잘 지내고 있지? 올 봄에 네게서 엽서를 받아들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아마도 히말라야를 찾아온 호주의 트레커나 원정대원 하나를 제대로 낚아챈 모양이군? 나는 확신해. 그들이 누구이든 너의 품성과 노동 그리고 균형 잡힌 태도에 크게 만족할 거야. 게다가 너의 근사한 영어솜씨로는 그들과 마음을 툭 터놓은 농담 따먹기 정도는 문제도 아닐 테고. 목장에서의 막노동이 결코 수월하지는 않겠지만 고된 노역의 하루를 보낸 다음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묵직한 와인 한 잔 음미할 정도의 여유는 있길 바래. 그것이 온전한 삶이니까. 혹시라도 오래 전에 내가 네게 무례했거나 건방지게 굴었다면 이제 그만 툭툭 털어버리고, 자, 너의 행운과 행복을 위하여 건배.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10월 22일

김희자

2007.10.18 14:13
*.134.45.100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고 가슴을 탁치게 만드는 선생님의 장문의 와인레토릭...

박선주

2007.10.18 14:38
*.131.158.25
지난 번 마실때 보다 더... 래키가 그리워져요...^^

황현명

2007.10.18 15:56
*.10.171.243
시라츠 선호하는데 함 마셔봐야것다...

한명석

2007.10.18 16:02
*.209.103.175
단순무식한 저는 래키가 마음에 드는군요.
글도 그렇고 와인도 그렇고. ^^

한수련

2007.10.18 16:04
*.235.169.165
짱!!!
profile

심산

2007.10.18 16:19
*.235.169.165
우리 나라 생활 용어(?)로는 정확히 '노가다'야...
참 내 호주 애들 하여튼 못말려, 와인 이름이 노가다라니...ㅋㅋㅋ

김주영

2007.10.18 17:40
*.121.66.212
젊은시절 노가다뛰며 일끝내고
총각김치 나부렁이에 마셨던 막걸리가 생각나는군
그 시원하면서 텁텁하고 강인한 꿀맛 말이지...

신명희

2007.10.18 19:51
*.99.244.25
어디 만큼이 진실이고...어디 만큼이 허구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겐 모두 생생한 사실이니까요~~^^
이 모두 선생님의 능력이시겠죠?
제가 와인예찬을 보고 와인스쿨에 들어와 와인에 풍덩~~ 입수하게 한...^^*
profile

심산

2007.10.18 19:55
*.201.17.166
으흠, 주영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명희, 여자가 안 등장하는 와인예찬은 모두 진실이야...^^

조현옥

2007.10.20 00:27
*.62.89.4
이 글을 읽으니 '고된 일상뒤에 감미로운 휴식' 으로서의 와인이 가슴에 와닿아요.^^
래키에게도 주영님처럼, 옛날의 '강렬했던 꿀맛'을 회상하며 미소짓는 훗날이 있길 바래요...^^
profile

심산

2007.10.20 15:46
*.51.163.128
와인은 귀족의 술이기 이전에 평민들의 술이었어
프랑스 혁명 때도 성난 민중들이 "물 대신 와인을 달라!"고 외쳤고
이태리 농부들이 밭 갈다가 새참에 마시던 술이 키안티였고
아르헨티나의 노동자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려고 마시던 술도 와인이었고...^^
profile

장영님

2007.10.21 08:16
*.144.133.52
노가다 끝내고 저녁놀 보며 마시는 노가다 와인 이라니...거칠 것 같은 래키 맛, 노을에 섞여 좀 순해질까요?
그나저나 주부 노가다는 저녁놀 질 때면 더 빡쎄지니... 틈이 없네, 틈이 없어!!^^

김의선

2007.10.22 14:28
*.37.0.7
그 네팔에서 얼마전 왕조가 무너지고 드뎌 마오이스트들의 공화정이...(먼산)

이성경

2007.10.22 15:36
*.254.25.234
저도 열심히 노가다 뛰어서 내년엔 꼭 와인 마실 겁니다.ㅋㅋ

권순미

2007.11.07 17:41
*.134.52.217
큭큭... 저와인 어디서 본건가 했더니...^^ 미국에선 비슷한 그림의 레이블이 있지요. 투벅? 투퍽?
아무튼... 좋은 인연이 남겨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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