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5-26 09:43:23 IP ADRESS: *.235.17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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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전직애인연합의 절묘한 블렌딩
심산의 와인예찬(15) 프랑스 론 남부의 샤토뇌프-뒤-파프(상)

이십대 시절의 나는 스스로를 ‘실연의 왕자’쯤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지금에야 제법 쿨(cool)한 척 폼을 잡고 있지만 청년시절의 나는 지나치게 웜(warm)하다 못해 거의 핫(hot)할 지경에 이르러 상처를 많이 받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게다가 왜 그리도 외로움을 많이 탔던지 혼자 있기를 너무도 두려워했었다. 덕분에 쉽사리 사랑에 빠지고, 너무도 뜨겁게 불타올랐다가, 끔찍한 상처를 받고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곰곰이 뒤돌아보니 이십대 시절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십대시절부터 나는 만나는 여자마다 결혼해달라고 졸라댔었다. 진심으로 그러길 원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칭얼대듯 그렇게 절실하게 졸라댔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다를 바 없었다. 언제나 실연이다.

당시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면 다른 여자들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매우 도덕적이거나 충실한 남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그냥’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어찌나 집요하게 졸라댔던지 나를 만났던 여자들은 대개 결혼을 약속해주었다. 하지만 말뿐이다. 시간이 조금만 흐르다보면 그녀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 나 결혼할 남자가 생겼어. 그럴 때마다 가슴은 찢어진다. 물론 세상은 당장 종말을 고할 듯 하다. 그러면 나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퍼마시곤 했다.

이십대 시절의 마지막 실연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녀 역시 예의 그 대사를 읊조리며 떠나가자 나는 도저히 제 정신으로 존재할 자신이 없었다. 그날로부터 꼬박 3박 4일 동안 위스키를 퍼마셨다. 물론 나는 빈털터리 룸펜이었으므로 그 모든 술값을 감당해준 것은 죄 없는 내 친구들이다. 녀석들은 마치 순번표라도 나누어 가진 듯 번갈아가며 나타나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 하소연을 듣는 둥 마는 둥하다가 술값을 계산해주고는 사라져 갔다. 마지막 순간에 기절한 나는 이틀 쯤 지난 후에 세브란스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당시 나를 담당했던 의사가 썩소를 지으며 내게 툭 던졌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내 평생 당신만큼 혈중 알콜농도가 높은 사람은 처음 봤소.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슬프고 웃기는 격언은 이런 것이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심지어 ‘세월’이라는 표현조차 너무 거창하다. 그냥 ‘약간의 시간’만 흘러가면 된다. 그러면 속없는 나는 ‘그녀’의 결혼식에 간다. 결코 깽판을 치려거나 자학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진심으로 그 결혼을 축복해주기 위해서였다. 신부대기실에서 나를 맞는 그녀들의 표정도 가지가지였다. 으이구 이 화상아, 여기까지 뭐 하러 왔어? 미안해, 너도 얼렁 좋은 여자 만나. 너 축의금은 안 내고 밥값만 축낼 거지? 아 참, 옛날에 네가 나한테 빌려간 책, 내 새 주소로 좀 보내줄래? 돌이켜 보면 그런 결혼식조차도 즐거운 추억거리다. 오죽하면 내가 농담 삼아 밝히곤 했던 나의 취미생활이 ‘결혼하기로 한 여자 결혼식에 참석하기’였겠는가?

[img2]

슬프고도 웃기는 것이 세월이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가르침을 주는 것 역시 세월이다. 세월이라는 것이 많이 흘러 나도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난 다음 마주치게 되는 그녀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깨달음을 내게 선사해주었다. 너 그때 왜 나를 버렸니? 내가 짐짓 익살맞은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보면 그녀들은 한결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헛웃음부터 내지르고 만다. 나 정말 기가 막혀, 내가 널 버렸다고? 그럼, 버렸지, 나랑 결혼하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해놓고 딴 남자랑 결혼했잖아! 이쯤에서 그녀들은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기 마련이다. 넌 말만 그랬지 전혀 결혼할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한 애였어. 네가 친구나 애인으로서는 나름 근사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남편감으로는 정말 빵점, 아니, 거의 마이너스였다구.

서른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그리고 나 역시 결혼이라는 걸 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십대 시절의 나는 남편감으로서는 정말 최악의 상대였다는 것을. 당시의 나는 돈을 십 원 한 푼도 벌지 못하고 있었다. 돈을 벌 능력은커녕 그럴 의지조차 전혀 없었다. 덕분에 당시의 애인들은 언제나 내게 용돈을 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청년시절의 경제적 능력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내가 줄곤 ‘딴청’을 피웠다는 사실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한 여자를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들도 만났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 ‘딴청’의 대상은 무엇이었던가? 산이었고, 문학이었고, 혁명이었다. 이제는 모두 다 버젓한 학부모이자 우아한 귀부인이 되어버린 그녀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네가 그때 나를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 알아? 싸우고 헤어져도 전화 한 통 없고, 갑자기 보름씩 소식이 끊겨 애간장이 다 타버린 다음에 쓰윽 나타나서는 기껏 한다는 말이, 설악산에서 바위 하고 왔어! 도대체 그런 남자를 믿고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미안하다. 하지만 그녀들이 조목조목 짚어대는 전과기록(!)의 항목들은 끝이 없다. 너, 나랑 만날 때, 맨날 옛날 애인들 이야기한 거 알어? 도대체 어떤 여자가 자기 애인의 옛날 여자들 이야기를 듣고 싶대?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속마음이야 어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은 언제나 자기 이전의 옛애인들에 대하여 궁금해 했고 이것 저것 물어왔다. 내 잘못이라면 “대사란 언표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현재 만나고 있는 그녀의 ‘함정’인지도 모르고 옛애인들과의 추억들을 미주알 고주알 보고하는 병신짓(!)을 일삼아왔다. 그리고 그 결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연들이 생겨났다. 그녀들끼리 서로 알게 되고, 만나게 되고, 심지어는 친해지게 된 것이다.

이제 그녀들끼리의 야릇한 우정 혹은 희한한 공모에 대해서 말할 때가 되었는데 벌써 지면의 끝이 보인다. 시나리오작법에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이제 겨우 1장을 끝냈을 뿐인데 서둘러 3장을 마무리하라는 격이다. 어쩔 수 없다. 이 스토리는 2회에 걸쳐서 연재하는 수밖에. 그래도 주어진 러닝타임이 다 되어가니 일단 마무리는 한번 지어보자. 서로를 잘 알고 지내며 심지어 친하기까지 한 옛애인들의 사회(society), 그것을 편의상 ‘전직애인연합’이라고 해두자. 그렇다면 과연 전직애인연합과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이미지의 와인이란 어떤 것일까? 그 복잡미묘한 구성과 저마다 다른 개성들 그리고 그 모두를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아우르는 커다란 스케일을 한 병에 구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img3]

프랑스의 론(Rhone) 지방은 다시 북부와 남부로 나뉜다. 론 북부는 내가 좋아하는 시라(Syrah)를 메인 품종으로 하여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하지만 론 남부는 전혀 다르다. 흔히들 론 남부를 ‘와인 블렌딩(blending)의 천국’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다종다양한 포도품종들을 뒤섞어 와인을 만든다. 심지어 적포도 품종과 청포도 품종이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의 몸을 섞어 전혀 새로운 향과 맛을 만들어낸다. 론 남부를 대표하는 블렌딩 와인의 걸작이 바로 '샤토뇌프-뒤-파프(Chateauneuf-du-Pape)'이다. 굳이 영어로 표기하자면 '뉴 캐슬 오브 포프(New Castle of Pope)'로서 ‘교황의 새로운 성’이라는 뜻이다. 14세기에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진 다음 여름별장으로 사용했던 곳이 바로 이 지역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샤토뇌프-뒤-파프에는 무려 8종류의 적포도 품종과 5종류의 청포도 품종이 들어간다.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블렌딩 기법이 적용된 와인이다. 각각의 품종들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다음 회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그 전체적인 인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 샤토뇌프-뒤-파프의 맛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메인 품종 하나만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이다. 샤토뇌프-뒤-파프는 다양한 추억들의 용광로이다. 이 와인에는 그리움 혹은 향수가 짙게 배어있다. 뜨거운 열정과 냉정한 균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드문 와인이다. 나는 ‘세월’이라는 그 슬프고도 웃기는 단어와 이토록 잘 어울리는 다른 와인을 알지 못한다. 전직애인연합이다.<계속>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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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로진

2007.05.26 10:09
*.129.236.216
미치고 팔짝 뛰겠군.
2주를 어떻게 기다리라는 겁니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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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호

2007.05.26 15:26
*.142.232.179
선생님의 제 나이 시절 이야기는 감정 이입(?)이 확실히 되네요..
100% 제 얘기이기도 해서..ㅎ
다음 이야기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현옥

2007.05.26 23:45
*.55.82.210
아아아! 진짜 2주를 어떻게 기다려요? 글고 그런 대책없던 남자가 이렇게 멋진 선생님으로 거듭나셨다니! 대체...
profile

심산

2007.05.27 00:04
*.131.158.105
나는 지금도 '대책없는' 남자야...^^

김경선

2007.05.27 10:29
*.5.153.93
아니, 여기 내가 쓴 글 어디갔어요?

최민성

2007.05.27 12:30
*.138.50.98
선생님, 결혼식에 축하해주러 가는 거 자체가 굉장히 cool한 거에요!^^

최현진

2007.05.28 11:32
*.73.30.12
음..2주는 훌쩍 지나가니까....
3부작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에요^^

한수련

2007.05.28 13:00
*.235.170.238
한번에 한여자 씩이었다니... 선생님이 순정파였다는 믿지 못할 사실에 은근 실망이예요. ㅋ
하지만 전직애인 조합이 결성된 후 부터 본격적인 스토리가 있겠죠?
2부 기대 만빵. ^^
profile

윤석홍

2007.05.28 14:43
*.229.145.41
화려한 휴가는 없었는가 몰라, 산에 미치면 2주도 금방 간다는 사실 잘 모를 수 밖에. 심샘,언제 석주길이나 한번 갈래요. 설악가라도 부르고 싶네요. 부처님 오신날 은해사 수목장을 어슬렁 거리며 먼저 간 혼들과 놀다 왔습니다. 후배 록가수 영혼은 어디쯤 있는가 알려주슈. 언제 다시 가게 되면 시 한편 읽어주고 오리다.

정경화

2007.05.28 15:10
*.96.222.1
제가 언젠가 선생님께 술자리에서 샤토네프뒤파프 같다고 한적이 있엇던것 같은데요.. ^^
profile

심산

2007.05.28 16:00
*.237.82.152
아아 석주길 표범길...설악산 바윗길들이 그립네요...^^

김지명

2007.05.29 09:27
*.14.121.166
어유~ 자랑쟁이 .. 샘 글 보면 .. 야.. 이런 거이 기술이라는 거구나 ... 정말 자랑 지대로 임에도 불구하고
티 안나고 밉지도 않다는거 ... (아무나 전직애인연합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자나여~)
암튼 엄청난 인력 ( attractive force ) 을 갖고 계시다는 거 인정.인정
픽션이라고 하면 반칙 ..

김경선

2007.05.30 01:50
*.142.200.165
지명, 맞아 맞아^^

김지명

2007.05.31 11:32
*.98.148.92
그져~~ ㅋ ( 우린 안티심산 ?) ^^
profile

심산

2007.05.31 13:48
*.235.170.238
지명 경선, 이 양김 여인들은 왜 안티를 하고 난리래...?
애인도 안 해주고 애인 소개도 안 시켜주고 그런 주제에...^^

홍주현

2007.06.02 14:40
*.74.84.115
음... 마셔보고 싶은데요~ ^^ 와인은 정말 이름 외우기 힘들어서 막상 와인코너에 가면 뭘 사야하지?하고 머리를 긁적이게 된다는...ㅋㅋㅋ 그래도 이름 2개는 외웠어요! 킴과 라랑드....

이성민

2007.06.09 17:35
*.148.210.106
결혼해달라고 졸라대는 심샘???.... 귀여웠을 거 같기도 하고....ㅋㅋㅋ
안믿겨져요....^^*
profile

심산

2007.06.13 15:45
*.201.16.229
성민, 넌 임마 그 옛날에 날 안 만난 걸 다행으로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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