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5-10 18:21:20 IP ADRESS: *.235.17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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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혀와 사자의 심장
심산의 와인예찬(14) 아프리카의 신품종 피노타쥬로 만든 와인들

와인을 마시며 얻게 되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동서고금을 휘젖고 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하여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진다는 뜻일 게다. 가령 첫눈에 반한 그림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작품의 화가에 대하여 알고 싶어지고, 그 화가의 다른 작품들도 감상해보고 싶어지고, 그 화가가 어느 시기의 어느 유파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음악에 필이 꽂히면 그 음악의 작곡자나 가수 혹은 연주자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진다. 와인 역시 다를 바 없다.

아무런 사전 정보나 지식도 없이 무심코 맛본 와인에 홀딱 반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라벨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 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이런 종류의 질문들이 고개를 드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것은 어느 나라의 어떤 지역에서 만든 와인일까? 포도품종은 무엇이고 어떤 양조방식을 적용시켰으며 생산자는 어떤 사람일까?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이제 별 수 없이 해당 와인이 속해 있는 역사와 문화를 파고드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이 생산자가 속해 있는 가문의 역사는 어떠한가? 그 가문은 필록세라를 어떻게 극복했으며 보어전쟁에서는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공부가 있다. 지겨운 공부와 즐거운 공부다. 시험에 통과하기 위하여, 자격을 획득하기 위하여, 남들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해야만 되는 공부는 지겹다. 하지만 사랑에서 비롯된 공부는 즐겁다. 단지 사랑하는 대상을 좀 더 알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인데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 있겠는가? 내게 있어서 와인공부가 꼭 그렇다. 나는 프랑스 국가공인 소믈리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멋진 와인을 좀 더 깊이 알고 싶어서 공부하는 것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즐거운 공부’의 대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와인 공부로 이야기를 좁혀보자. 이 공부의 가장 믿음직한 참고서는 역사책과 지리책이다. 이 책들은 또한 산(山) 공부의 배경 지식이기도 하니 이래 저래 자주 뒤적이는 수밖에 없다. 이 분야에 관한 가장 멋진 책들을 여럿 펴낸 곳들 중의 하나가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다. 멋진 사진과 도판들이 그득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책들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 지구라는 행성 전체가 온통 내 앞마당인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 못지않게 훌륭한 책이 바로 우리가 고삐리 시절 그렇게도 지겨워했던 [역사부도]와 [지리부도]이다. 같은 책이라도 ‘지겨운 공부’에 쓰일 때는 지겹고 ‘즐거운 공부’에 쓰일 때는 즐겁다는 사실이 참으로 역설적이다.

[img2]

얼마 전에 [역사부도]와 [지리부도]의 아프리카 편을 샅샅히 뒤져볼 기회가 있었다. 주제 넘게도 ‘아프리카 와인’에 대한 특강을 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지중해 연안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후추의 무역이 왜 그리도 중요했는지, 케이프타운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따위를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과 박해는 언제 일어났고,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는 어떻게 다르며, 보어전쟁의 승리자는 누구였는지 따위를 ‘즐겁게’ 공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는가? 고작해야 와인이나 홀짝거리는 주제에 동서고금의 역사와 지리와 문화를 휘젖고 다니게 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아프리카 와인특강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첫 번째 부류는 ‘샤또몽벨’의 멤버들이다. 내가 이끌고 있는 [심산와인반]의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예비수강생 그룹이다. 두 번째 부류는 아프리카 동호회인 ‘바오밥’의 멤버들이다. 아프리카를 여행했거나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세 번째 부류는 히말라야 산간오지마을 후원회인 ‘히말라야 어깨동무’의 멤버들이다. 사실 이날 모임의 제1주제는 ‘아프리카 와인특강’이었지만 제2주제는 ‘제3세계 후원경험의 공유’였다. 지난 수년간 모범적으로 축적되어온 히말라야 어깨동무의 후원경험을 바오밥 멤버들에게 귀띔해주는 자리를 겸했던 것이다.

쓰고 보니 너무 거창해졌다. 그냥 심플하게 말하자. 우리는 아프리카 와인에 대하여 좀 더 상세히 알아보자는 핑계로 한 자리에 모여 그냥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게 전부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웠다. 와인의 놀라운 친화능력(!)은 이 자리에서도 유감없이 그 위력을 발휘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금세 마음을 열고 서로 정겨운 농담들을 주고 받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마구 뒤섞인 세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제멋대로의 합종연횡이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샤또몽벨의 멤버가 바오밥에 가입하고, 바오밥의 멤버가 히말라야 어깨동무에 가입하고, 히말라야 어깨동무의 멤버가 샤또몽벨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이 의표를 찌르는 엠엔에이(M&A) 혹은 즐거운 이합집산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물론 와인의 힘이다.

제목은 거창하게 아프리카 와인특강이라고 달았지만 이 날 집중적으로 마신 것은 남아공의 와인들이다. 요즘 와인계에서는 “칠레와인이 지고 남아공와인이 뜬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그만큼 가격 대비 품질이 좋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와인들이다. 공부한 티를 조금 내자면 현재 남아공에서 가장 급격하게 재배면적을 늘여가고 있는 품종은 쉬라즈(Shiraz)이다. 1997년에는 1,329ha에 불과했던 쉬라즈의 재배면적이 2004년에는 무려 9,414ha로 늘어 무려 60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다. 그날 맛본 남아공 쉬라즈는 저 유명한 호주 쉬라즈에 비하여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와인메이커들도 여럿 발견했다. 플레지르 드 메를르(Plaisir de Merle)는 17세기 후반 종교박해를 피해 이민 온 프랑스 위그노파 신도들이 개척한 유서 깊은 와이너리다. 18세기에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던 디저트 와인의 명가 콘스탄시아(Groot Constantia)도 빼놓을 수 없다. 신세계다운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아니스톤 베이(Arniston Bay)도 인상적이다. 이 회사는 슈냉 블랑(Chenin Blanc)과 샤르도네(Chardonnay)를 섞기도 하고, 쉬라즈와 메를로(Merlot)를 섞기도 하고, 메를로와 피노타쥬(Pinotage)를 섞기도 한다. 한 마디로 자유분방하기 이를 데 없는데 가격마저 저렴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이것 저것 맛보며 킬킬대기에 그만이다.

[img3]

이날 가장 주목받았던 새로운 품종은 피노타쥬이다. 남아공 와인랜드의 핵심인 스텔런보슈(Stellenbosch) 대학의 아브라함 이작 페롤드(Abraham Izak Perold) 교수가 1925년에 탄생시킨 교잡종인데, 이름에서 추측해볼 수 있듯 피노 누아(Pinot Noir)와 에르미타쥬(Hermitage)를 합쳐서 만든 남아공만의 독자적인 품종이다(여기서 에르미타쥬란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잘 자라는 생소(Cinsault)의 남아공식 이름이다). 흔히들 이 품종을 가리켜 “여인의 혀와 사자의 심장에서 추출한 체액”이라는 멋들어진 표현을 사용한다. 사자의 심장이 담력 혹은 용기를 뜻한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인의 혀’에서 무언가 에로틱한 상상을 하는 것은 오버다. 여기서 ‘여인의 혀’란 ‘하염없는 수다’의 상징이다. 간단히 시쳇말로 표현하자. “피노타쥬를 마시게 되면 하염없이 수다를 떨 수 있고, 겁대가리를 상실하게 된다.”

바오밥의 회장은 ‘무파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다. 아프리카 사막에서 열린 ‘사하라 마라톤대회’를 며칠에 걸쳐서 완주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 ‘사자의 심장’을 가진 사내가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무파사마저도 피노타쥬 앞에서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만다. 검게 그슬린 근육질의 사내가 여인의 혀를 달고서는 하염없이 수다를 떨며 재롱(?)을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그것이 피노타쥬의 힘이다. 와인은 공부를 즐겁게 만든다. 와인은 우리에게 사자의 심장과 여인의 혀를 달아준다. 덕분에 서울 한복판 신촌 구석에 앉아 히말라야와 아프리카를 그리워하고 걱정하다가 끝내는 그곳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보자며 대뜸 의기투합(!)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어찌 와인을 예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5월 14일

홍주현

2007.05.10 20:47
*.161.5.42
하염없이 수다를 떨게되고 겁대가리를 상실하게 된다! 크~ 진짜 맛보고 싶네요. 혼자 낄낄거리며 읽다가 사무실에서 주목받아버렸네.. 후후
profile

명로진

2007.05.10 21:31
*.86.217.161
즐거운 공부에 한 표!

한수련

2007.05.11 14:06
*.235.170.238
그날 수업과 뒤풀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상당히 기분이 좋았던 하루였답니다. 집에 가서 오랫만에 행복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어요.
profile

심산

2007.06.03 20:40
*.235.170.238
주현의 증세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군...조만간 와인반에 합류할 계획?^^

조현옥

2007.06.04 23:16
*.55.82.214
와인 자체보다는 이렇듯 와인에 열중하게 하는 그 무엇이 정말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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