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김진석 등록일: 2011-09-26 12:48:48 IP ADRESS: *.12.4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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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 slow slow"

나의 삶을 뒤돌아 본다면 한마디로 ‘정신이 없다.’로 말할 것이다. 10여년 신문사,잡지사에서 사진기자로 사회 현장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살아왔다. 뒤를 돌아볼 시간도 없었다. 그냥 앞만보고 달리고 달린 것이다.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마음도 나를 찾아보기 힘든 하루하루 였다. 그러던 어느날 난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뭐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천천히 내가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걷기’였다. 제주 올레길부터 지리산 둘레길까지 천천히 호흡하고 천천히 길을 걸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이 스페인의 순례자길이었다.

40여일 걸을 수 있는 짐을 배낭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나의 분신과도 같은 카메라를 챙겨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떠나온 길. 베낭에 카메라 가방을 동여 메고 긴 숨고르기를 한번 한후 발을 내 딛었다. 생각보다 상쾌하다. 간간히 보이는 마을 주민들이 나에게 '부엔 카미노'라고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부엔 카미노 -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보통 '길 잘 걸으세요'라고 해석하면 된다.)

첫날의 여정,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순례자길중 가장 어렵다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오르막이 시작된다. 출발할때의 상쾌함은 이미 없어지고 거친 숨과 더딘 발걸음만 계속된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출발 전부터 않좋았던 어깨가 시작부터 말썽인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때마다 통증이 심해진다.

한 시간쯤 올라갔을까. 도저히 걸을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난 그 자리에서 푹 주저앉아 멍하니 아주 잠깐이었지만 걸어온 길을 돌아 본다. 내가 출발한 마을이 저 언덕 아래 있다. 겨우 2km 왔을까. 순간 내 머리 속은 수많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한참을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넋을 놓고 있었다. 언덕 밑에서 작은 체구의 이탈리아 할아버지 한 분이 (거의 거북이 속도로) 올라온다. 베낭을 양손에 바짝 당기며 천천히 올라온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보인다. 겉 모습으로는 나 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 할아버지는 내 앞에 잠시 멈추며 씨익 웃는다. 그리고는 숨가뿐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slow slow slow"

그리곤 다시 베낭을 움켜 잡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을 다시 걷는다. 순간 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여러가지의 감정들이 생겼다. 용기,희망,등등 긍정적인 단어를 모두 동원해도 표현 할 수 없는 감정. 난 할아버지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베낭을 메고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묵직한 느낌의 카메라를 손에 쥐고 천천히 발을 내 딛었다.  

p.s 그 후 40일이 지난 후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할아버지를 산티아고 거리에서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나를 힘껏 안으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나 역시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힘껏 껴안았다.

사진작가 김진석

[좋은생각]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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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로진

2011.09.26 14:28
*.192.225.144
이런 게....대세 지요. ^^

김신희

2011.09.26 15:14
*.114.22.143
전 이 빨간코 아저씨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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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11.09.26 16:16
*.224.135.70
진석아, 아래 사진을 찍을 때...
네가 카메라 앞으로 한 세발자국 더 나와 있는 거 맞지...?ㅋㅋㅋ

김진석

2011.09.26 16:23
*.12.48.200
명샘/ 송구스럽습니다요. ^^
신희/ 요즘 잠수중인 신희.
심샘/ 흐흐흐흐 그렇게 나오신다면 심샘 특집 한번 할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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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원

2011.09.26 19:02
*.12.65.236
두드러진 빨강과 초록의 대비가 너무 상쾌하고 아름답네요 ^^

이종문

2011.09.26 22:03
*.166.87.126
현재 명쌤 수강생이고, 김쌤 예비수강생이며, 무엇보다도 5주 전 산티아고 땅을 밟고 온 저로선
가슴 뜨거워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임희대

2011.09.27 06:18
*.11.250.27
사진반 수업 후, 뒷풀이에서 들은 얘기인가? 긴가민가한데요...
젊은이들이 노년들보다 고산병에 더 잘 걸린답니다.
삶의 조급함에서 벗어난 여유,
그 분들의 노익장이 이런 거 아닐까요?
슬로우...슬로우...그리고 슬로우...
더불어 하이쿠 하나,
'홍시여, 젊었을 때는 너도 무척 떫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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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로진

2011.09.27 11:26
*.192.162.192
홍시여 젊었을 때는 너도 무척 떫었지....

오....뒤통수를 때리네요.

김신희

2011.09.27 14:24
*.114.22.143
심샘 특집 좋아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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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11.09.27 16:10
*.224.135.19
진석이보다 신희가 더 미워....ㅋㅋㅋ

김진석

2011.09.27 18:57
*.12.48.200
신희야 기대해라 3년동안 찍은 심샘의 사진중 골라골라 올려줄게 ㅋㅋㅋ

박수자

2011.09.28 09:37
*.234.107.46
아....산티아고. 나도 가고 말거야. 가고 말끼야
아... 나도 사진 배우고 싶어. 배우고 말끼야

최준석

2011.09.28 16:07
*.152.24.74
낯익은 아저씨네요..^^

강소영

2011.09.29 16:33
*.212.195.27
슬로우 고고. 혼자 가는 여행에선 친구를 만나게 되죠. 그 설렘, 다시 만끽하고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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