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김진석 등록일: 2013-04-24 16:27:46 IP ADRESS: *.111.10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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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다닐때 취재 했던 내용입니다. 당시 권투에 대한 인터뷰 취재를 했는데요. 이후 반응이 좋으면 몇 편 더 올리겠습니다. 이 기사가 2003년 5월에 취재 되었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비운의 천재 복서 '권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바로 '외로움'이에요. 남들 앞에서는 활발해 보여도 혼자 있으면…. 어렸을 때 환경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저 같은 생고아들은 사회에 적응하기가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 지금껏 살아 왔던 것과는 달리 '정반대'로 살고 싶어요. 지난날을 생각하니 참 멍청하게 살아 왔어요. '바보 같다'라는 표현도 부족해요. 정말 멍청하게 살았어요…."

176전에서 단 9번의 패배만을 기록했던 국가 대표 최고 복서 황철순씨(49)와 고등학생 신분으로 대등한 경기를 펼쳐 세인을 놀라게 했던 타고난 복서 권철(42).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황철순씨는 "저돌적으로 들어와 죽다가 살아났다"며 그 시합을 잊지 못한다.

"문화 체육관에서 했던 경기였는데 MBC에서 생중계를 했어요. 학생 대표로 고1 때 싸웠는데 아무 것도 몰랐죠. 그때는 복싱이 인기가 좋아서 사람들도 굉장히 많고 응원도 대단했어요. 황철순씨는 70-80년대 최고의 아마 복서였어요! 그 분이 마지막으로 아마추어 시절을 정리하는 명예로운 자리이자 축제였죠."

27전 26승 1무 19KO, 81년 전·후기 통합 최고 신인왕, 제2의 박찬희, 그리고 고아 복서. 짧게 끊어 치는 매서운 주먹이 일품이었던 비운의 천재 복서 권철. 그는 항상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고아 복서'라는 수식어가 싫었다고 한다.

그의 본명은 '강은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실수로 기차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 그는 서대문의 한 아동 보호소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다. 그는 유년 시절 "아동 보호소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며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전 다른 세상이 있는 걸 몰랐어요. 가족의 뜻도 글자도…. 뒤늦게 커서야 알았죠. 맞아서 죽는 아이들, 아프다가 혼자 죽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도망가다 맞고, 먼저 들어온 선배한테 맞고 그러다가 죽으면 아침에 쓰레기차가 실어가고…. 사감 선생님은 신경도 안 쓰죠. 어떤 애들은 재래식 화장실 구멍으로 도망치다가 종종 빠져 죽기도 했어요.

딱 일주일에 한 번 치료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요. 근데 이건 뭐 피난민 저리 가라죠. 피난민도 그런 피난민이 없어요. 일렬로 줄서서 그렇게 치료받고 작은 상처나 부상들이 제대로 치료되지 못해 혼자 아프다가 죽는 애들이 많았어요. 제가 자꾸 이 얘기를 하는 건 너무 서러워서 맘이 착잡해서…. 제 자신이 스스로 미운 건 아직도 정을 잘 못 느껴요."

울타리 너머 다른 가정집 TV를 통해 본 '복서'는 그에게 어린 시절 한줄기 빛이 되었다. 일찍이 복싱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던 터라 그는 얼마 안가 무료로 복싱을 배우게 됐고 장학생으로 당당히 서울체고에 진학했다.

"보호소에선 정해진 시간에만 밥을 먹을 수 있어요. 근데 운동하느라 자꾸 밥 먹는 시간을 놓치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 학교 친구들 밥도 뺏어 먹고, 정말 물로 배를 채웠죠. 언젠가 겨울이었는데 밥이 꽁꽁 얼어 숟가락도 안 들어가더라구요. 그때는 그런 밥조차도 맛이 있었어요.

'삼양 쇠고기 라면'이라고 아세요? '쇠고기'라는 말에 우리는 정말 그 라면이 고기 국물인 줄 알았어요. 애들 여럿이 모여 서로 돌아가며 라면 국물 마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서울체고에 진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철순과의 시합을 끝으로 아마추어 생활을 정리한다. "보호소 시절부터 했던 단체 생활, 조직 생활을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는 그는 "완전히 질려버렸다"라는 표현으로 그 당시를 회고한다. 프로 전향 후에도 그는 승승장구하여 명성과 부를 얻고 잃어 버렸던 가족을 되찾게 된다.

"81년 신인왕이 되고 나니 생활이 갑자기 달라졌어요! 스타들이 종종 하는 말 있잖아요? 어느 날 아침에 눈 떠보니 세상이 달라졌다 라는 말이랑 제가 똑같았어요. 게다가 매스컴은 제가 고아라고 계속 관심을 쏟아주고, 길거리를 가더라도 사람들이 절 많이 알아봤죠. 사람들이 절 볼 때마다 밥 사주고 취직시켜준다 하고 덕분에 그땐 정말 잘 먹었어요.

유명해지면서 가족이 절 알아보고 찾아 왔어요. 근데 가운데서 매니저가 제 혈액형을 속이는 바람에 또 고생을 했죠. 전 가족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깐. 아버지는 절 잃어버린 이듬해에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형, 누나, 어머니와 만났는데 처음엔 아무 느낌도 없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6개월은 제가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누나들이 절 진심으로 대해줬을 때예요. 그런 느낌이나 감정은 처음이었어요. 그때 알았죠. 남자들 세계에 치어 그간 제가 얼마나 원시인처럼 살았는지…."

가족을 되찾은 그는 85년까지 나름의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세계 타이틀 전초전만 여러 번 반복할 뿐 좀처럼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쥘 기회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맨 마지막 했던 시합이 최강 선수와의 시합이었는데, 이 친구는 라이트급이고 전 페더급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시합이었죠. 주변에서도 많이 안타까워했어요. 근데 선수가 아무리 노력하고 잘하려 해도 매니저가 시합을 주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연예인이랑 똑같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저보다 더 못한 선수들이 챔피언 되고 더 큰 경기를 치르는데 점점 의욕이 떨어지더라구요. 그 당시는 몰랐는데 그때 조금 더 참고 기다려서 챔피언 타이틀을 얻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니 10전 9패 1무여도 결국 챔피언 타이틀을 따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만약 제가 챔피언이 됐다면 다른 길로 빠지지도 않았을 거고….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88년 프로 은퇴 후 그는 험난한 방황을 시작한다. 어두운 세계와 인연을 맺게 된 그는 두 번의 교도소 생활을 거치며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제서야 간신히 어렵게 다시 복싱 곁으로 돌아온 그는 "건달의 '건' 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며 과거를 잊고 싶어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아는 게 주먹밖에 없었어요. 절 환영하는 곳도 그 곳뿐이었죠. 복서로서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을 때는 간접적인 느낌이었어요. 복싱을 잘해서 얻은 관심이지 권철이라는 '사람'을 좋아해준다는 직접적인 느낌이 없었어요.

근데 그 곳은 제가 복싱을 잘 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권철'을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진짜 좋아했는데 그 사람들은 진심이 아니었나봐요.

결국 건달도 '돈' 이었어요. 제 아무리 멋있고 의리가 있어도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그걸 몰랐어요. 영화 '파이란' 보셨어요? 그거 제 얘기예요. 결국 나이 들고 돈 없으니깐 절 '폐물'로만 보더라구요."

고달프고 외로웠다. 그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자꾸 살자"고 다짐한다. 마음과는 달리 본의 아니게 벗나가는 그의 인생 행로에 그는 무던히도 지쳐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요. 항상 혼자이다 보니 희망이나 의욕도 없고. 자식이 있으면 애 때문이라도 더 열심히 살았을텐데…."

그에겐 10년 단위로 행복과 불행이 교체하는 나름의 징크스가 있다고 한다. 이제 2003년부터는 다시 행복해질 차례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정말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 볼 거예요"라고 나지막히 읊조리는 그에게 꿈이 하나 있다.

"나이가 드니 친구들도 아내나 애들을 챙겨요. 저도 이젠 가족을 갖고 싶어요. 만나지는 않지만 제 가족들 모두가 행복했으면 해요. 큰 욕심 없이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제는 저도 정말 가족이 갖고 싶습니다."

최상식

2013.04.25 11:11
*.164.202.87
예전 복서들은 다 드라마가 있는 분들인듯 하네요 ㅎㅎ 권투이야기 계속 보고싶습니다 ㅎㅎ

임양윤

2013.04.26 10:14
*.161.238.9
공감가는 이야기가 많습니다.ㅎㅎ

김진석

2013.04.26 16:18
*.111.105.101
상식/ 그렇지 모든게 스토리고 드라마지. 권투 선수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임양윤/ 네. 예전 기사들을 다시 읽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공감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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