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7-27 12:50:03 IP ADRESS: *.147.6.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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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히 지켜본 한 계급의 소멸
루스 프로어 자발라(Ruth Prawer Jhabvala, 1927-    )

너 맨쇼비니스트지? 그렇지 않다면야 어떻게 연재를 시작한 지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여성작가가 한명도 안 나올 수 있어! 요즈음 들어 받고 있는 억울한 모함이다. 이 기회에 고백컨데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차별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여지껏 연재한 작가들과 같은 반열에 들 만큼 빼어난 업적을 남긴 여성 시나리오작가를 찾아내기가 힘들었을 따름이다. 그런 맥락에서 루스 프로어 자발라의 존재는 고맙기까지 하다.

그녀의 삶은 국제적이다. 유대계 폴란드인의 딸로 독일에서 출생한 그녀가 영국으로 이주한 것은 2차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 런던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인도인 건축가와 결혼하여 '자발라'라는 인도식 성(姓)을 얻고 뉴델리로 옮겨간다. 자발라의 출발점은 장편소설이었다. 인도의 식민지 체험을 배경으로 영국인과 인도인의 문화적 갈등을 그린 그녀의 작품들은 대부분 영국에서 출판되어 따뜻한 호평을 얻었다.

시나리오 데뷔작은 인도의 젊은 신혼부부가 겪는 삶의 애환을 코믹하게 표현해낸 [가장]. 이후 거의 40년 동안이나 '환상의 삼각편대'를 이루어온 '머천트-아이보리-자발라' 팀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필모그래피에서 감독의 이름이 생략된 것은 모두 다 제임스 아이보리가 연출하고 이스마일 머천트가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쓴 스무편 남짓한 작품들 중에서 예외는 단 세편뿐이다). 이들의 이름을 세계영화계에 알린 초기 작품들은 [셰익스피어 왈라](1965) 와 [봄베이 토키](1970). 그녀의 소설들을 영화로 옮긴 것인데 인도와 영국의 합작형태를 띠고 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도영화는 대단한 활황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 연간 제작편수에서 할리우드를 뛰어넘을 정도였다고 하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훗날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한 인도영화의 거장 샤트야지트 레이가 편집이나 음악에 참여했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된 이러한 형태의 작품들은 비평적 호응은 물론이거니와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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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자발라의 작품세계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첫째, 더이상 자신의 소설을 각색하지 않는 대신 주로 헨리 제임스([유럽인들], [보스턴 사람들])나 E.M.포스터([전망 좋은 방], [모리스], [하워즈 엔드])의 작품들을 각색하기 시작했다. '자발라-아이보리' 콤비의 독특한 개성이 만개한 것도 이즈음이다. 즉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 부르주아계급의 우아한 일상을 다루되, 그 일상의 균열 속에서 고뇌하는 캐릭터들을 보여줌으로써 한 계급의 소멸을 담담히 증언하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변화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영화의 제작형태가 변했다. 인도-영국영화에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영화 혹은 영국-미국영화로 탈바꿈한 것이다. 인도의 입장에서는 서운한 선택이었겠지만 '세계화'라는 잣대로만 본다면 대단히 성공적인 결단이었다. 자발라에게 두개의 오스카를 안긴 것도 모두 이 계열의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작품은 [모리스]. 1914년에 집필이 완료 되었으나 E.M.포스터의 사후에야 출판이 허락되었던 동성애작품인데, 시대의 압력 때문에 마음껏 자기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게이로 나왔던 휴 그랜트의 연기가 대단히 좋다. [군인의 딸은 울지 않는다]는 2차대전 참전용사로서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와 [씬 레드 라인](1998)의 원작소설가인 제임스 존스와 그의 딸 카일리 존스의 이야기. 한 여성작가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성장영화인데 그 행간에서 루스 프로어 자발라 자신이 겪어온 삶의 편린들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명백히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나리오작가로 우뚝 선다는 것은 도대체 얼마 만한 고통과 노력을 요구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최소한 남들 앞에서 함부로 눈물을 내비치지는 않을 만큼의 인내와 오기는 필요할 것이다. 자발라는 그 일을 해냈다. 나는 세상의 모든 딸들이, 비록 아버지가 군인이 아니더라도,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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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2년 [가장](Householder)
1979년 [유럽인들](The Europeans)
1981년 [쿼텟](Quertet)
1982년 [열기와 먼지](Heat and Dust)
1984년 [보스턴 사람들](Bostonians)
1986년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 ⓥ ★★
1987년 [모리스](Maurice)
1990년 [브리지 부부](Mr. and Mrs. Bridge) ⓥ
1992년 [하워즈 엔드](Howards End) ⓥ ★★
1993년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 ★
1995년 [파리의 제퍼슨씨](Jefferson in Paris)
1996년 [피카소](Surviving Picasso) ⓥ
1998년 [군인의 딸은 울지 않는다](A Solder's Daughter Never Cries)

ⓥ는 비디오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수상작

[씨네21] 2000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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