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6-04 22:05:25 IP ADRESS: *.201.17.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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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멜로

리처드 라그라베네스(Richard LaGravenese, 1959-    )

 

시나리오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신물이 나도록 듣게되는 잔소리가 있다. 포지셔닝이 어떻구 소구대상이 저떻구 하는 마케팅 용어들이다. 제대로 된 여론조사기관에서 과학적인 수치까지 들이밀며 휘몰아치니 건성으로라도 고개를 끄덕거려주지 않을 도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 깊은 곳에서의 동의까지 내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영화는 극히 한정적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에 이르는 여성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청춘스타들을 기용해 판타지를 심어주고 대리만족을 시켜주며 해피엔딩으로 이끌어가는 영화? 솔직히 말해서 넌덜머리가 난다. 그렇다면 어른들이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영화는 아예 만들지도 말아야된다는 소리인가?  

리처드 라그라베네스는 어른들을 위한 시나리오를 쓴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마케팅의 포지셔닝과는 아예 무관한) 주변 사람들의 내밀한 슬픔과 갈망을 새삼스럽게 재발견하게 된다. 상처한 중년남자나 이혼한 중년여자라고 해서 어찌 메마른 가슴 뿐이겠는가? 병들어 누운 핼쓱한 아내에게도 소녀 같은 천진함이 있으며, 엘리베이터 보이나 하는 못생긴 중년남자의 가슴 속에서도 사춘기 소년 같은 연정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그의 작품들 중에는 이른바 블록버스터가 없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떤가? 이제는 한물 가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중년배우들에게는 한층 원숙해진 연기를 선보일 기회를 주고, 극장 매표소 앞에 줄을 서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던 중년관객들에게는 모처럼 잊었던 감성들을 어루만지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브룩클린 출생의 라그라베네스는 뉴욕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그가 훗날 자신의 출세작이 된 [피셔킹]을 쓰기 시작한 것은 뉴욕 변두리에 있는 코미디클럽의 대본작가로 연명하고 있을 때였다. 시나리오 데뷔작은 중년이 된 히피들의 좌충우돌 코미디 [루드 어웨이크닝]. 청년시절의 이상을 쫓아 무려 20년 동안이나 중남미의 촌구석에서 코뮨생활을 하다가 뉴욕으로 돌아와보니 친구들은 이미 여피가 되어 있더라는 스토리인데 웃음의 행간마다 쌉싸름한 슬픔이 묻어나는 코미디 소품이다. 아카데미상 5개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던 [피셔킹]은 라그라베네스의 출세작이자 대표작. 정신분열에 빠져든 여피 제프 브리지스와 구도자적 자세를 가진 홈리스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대결이 볼만 하다. 병상에 누운 엄마와 막 되먹은 아이들을 다룬 가족드라마 [앤디 맥도웰의 마이 히어로]는 여배우 다이언 키튼의 감독데뷔작인데 흥행에는 저조했지만 평단으로부터는 따뜻한 갈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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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년대 최고의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대중연애소설의 각색작품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아무래도 미스캐스팅인 듯 하다. 아무리 왕년의 터프가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지만 매혹적인 떠돌이 사진작가를 연기하기엔 너무 늙어 보인다. 그 자신이 감독이 아니었다면 그런 캐스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로즈 앤 그레고리]나 [호스 위스퍼러] 역시 감독이 곧 주연을 겸했다는 점에서 같은 계열의 작품. [로즈 앤 그레고리]를 보면 과거 바브라 스트라이전드가 앓았던 공주병이 이제는 황녀암으로 원숙해졌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중년남녀의 러브스토리치고 이만큼 아기자기한 영화도 드물다. 답답한 노처녀 스트라이전드 때문에 애간장을 끓이는 노모 역의 로렌 바콜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호스 위스퍼러]를 보다보면 문득 서글퍼진다. 로버트 레드퍼드는 아직도 자신을 금발의 미소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말과 영혼의 대화를 나눌 줄 아는 서부의 중년남자와 일 밖에 몰랐던 도회지의 워커홀릭 중년여인과의 짧았던 로맨스는 여전히 감미롭다. 

  라그라베네스는 감독데뷔작 [키스]에서 자신만의 색깔 혹은 포지셔닝을 더욱 분명히 한다. 별볼일 없는 이혼녀 홀리 헌터와 그보다 더 한심한 땅딸이 엘리베이터 보이 대니 드 비토의 사랑이라? 과감하다. 안톤 체홉의 단막극 여러 편을 짜깁기하여 만든 이 영화에는 영어원제가 훨씬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마음껏 살아라! 그것은 혹시 라그라베네스가 그 잘난 마케팅 대상도 못되고 감정도 없는 존재들로 치부되고 있는 전세계의 모든 중년남녀들에게 외치고 싶었던 복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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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89년 아론 루소의 [루드 어웨이크닝](Rude Awakening)
1991년 테리 길리엄의 [피셔킹](The Fisher King)ⓥ★
1994년 테드 드미의 [레프](The Ref)
1995년 다이언 키튼의 [앤디 맥도웰의 마이 히어로](Unstrong Heroes)ⓥ             
           클린트 이스트우드의[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알폰소 쿠아론의 [소공녀](A Little Princess)ⓥ
1996년 바브라 스트라이전드의 [로즈 앤 그레고리](The Mirror Has Two Faces)ⓥ
1998년 로버트 레드퍼드의 [호스 위스퍼러](The Horse Whisperer)ⓥ             
           리처드 라그라베네스의 [키스](Living Out Loud)ⓥ             
           조너선 드미의 [빌러브드](Beloved)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씨네21] 2000년 5월 23일

백소영

2006.06.22 23:48
*.44.147.104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책보다 더 재밌게 봤죠.
좀 늙긴 했지만, 매릴스트립과 분위기가 잘 어울렸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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