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3-06 20:05:43 IP ADRESS: *.254.8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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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에서의 7년>이 내 삶을 바꿨다"
[오마이뉴스 2006-01-10 10:14]    
[오마이뉴스 배을선 기자] 브래드 피트가 주연했던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의 실제 인물인 알프스 등반가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가 1월 7일(현지시간) 토요일 93세의 나이로 숨졌다. 여행가이자 연구가, 산악인이자 작가, 그리고 무엇보다 달라이 라마의 교사이자 친구로 유명했던 그의 죽음에 오스트리아는 슬픔에 빠졌다.

 
▲ 하인리히 하러의 사망을 보도한 오스트리아 일간지들.
ⓒ2006 배을선
지난 5일 중태에 빠진 하러는 캐른튼의 프리사크 종합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일 새벽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장례식은 오는 14일 하러의 고향인 휘텐베르크에서 치러진다. 볼프강 쉬셀 총리와 캐른튼 주지사 요르그 하이더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93년이라는 그의 긴 삶은 대부분 도전과 모험의 연속이었다. 나치친위대 멤버였던 과거의 행적이 드러나면서 그의 세계적 명성이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노령의 고백을 접한 오스트리아인들은 오히려 그가 오스트리아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이제 또 다른 세상으로의 여정을 떠난 하인리히 하러의 삶을 뒤돌아본다.

파란만장했던 삶, 그리고 티베트에서의 7년

오스트리아인들은 말한다. "어떤 오스트리아인도 하인리히 하러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못했다"고. 1912년 7월 6일 휘텐베르크에서 우체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리히 하러는 그라츠에서 스포츠와 지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산악안내자로 일했으며 겨울에는 스키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선수로 1936년 올림픽에 참가한 하러는 개막식 때 오스트리아 국기를 들고 입장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는 의지가 강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며 또한 재주가 많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1938년 마지막 국가시험을 치른 후 같은 날 스위스의 그린덴발트(Grindenwald)로 산악등정을 떠났다. 비엔나 출신인 프리츠 카르파렉, 독일 출신인 안데를 헥마이어와 루드빅 푀어그와 함께 그는 7월 24일 2000미터 높이의 스위스 아이거 북벽을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거 북벽은 그 당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등반가들이 실패한 장소였다.

 
▲ 하러가 쓴 베스트셀러 <티벳에서의 7년>.
ⓒ2006 Ullstein
아이거 북벽 등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하러는 1939년 독일 히말라야 탐험대의 낭가 파르밧(Nanga Parbat) 등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탐험대는 낭가 파르밧에 다다르지 못하고 대신 디아미르(Diamir) 벽을 통해 정상에 오르는 새로운 루트를 발견했다. 등반을 마치고 돌아오는 9월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영국군 포로가 된 하러는 포로수용소에 머무르는 동안 4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다 실패한 뒤 5번째에 이르러 수용소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친구 한명과 함께 1944년 4월 29일 수용소에서 탈출한 하러는 티베트까지 20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21달 동안 걸어갔다. 1946년부터 1951년까지 7년을 티베트에서 머무른 하러는 어린 달라이 라마의 조언자이자 교사로 인연을 맺었고, 1953년에는 그의 경험담을 기록한 책 <티벳에서의 7년>을 출간해 작가로서 다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하러는 그 이후 연구자로서 남미, 그린란드, 알래스카, 아프리카, 하와이, 카이티, 그리고 뉴기니 등을 여행했으며 여행하는 곳곳에서 30여 개의 정상을 등정했고 파푸아뉴기니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네팔, 수리남, 프랑스령 가이아나, 수단 그리고 보르네오를 두루 여행한 하러는 1982년 오스트리아로 귀항한 후 한 번 더 티베트를 방문했으며 같은 해에는 부탄을 여행했다.

그러나 그의 세계적인 명성이 언제나 순탄대로를 밟았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씁쓸한 시련이 있었다.

명성과 함께 드러난 나치친위대 전력

▲ 장 자크 아노 감독,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
1997년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브래드 피트를 캐스팅해 그의 소설 <티벳에서의 7년>을 영화화하면서 하인리히 하러는 다시금 새로운 세대들로부터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의 감춰졌던 과거도 드러났다. 90년대 말 언론과 미디어는 그가 젊은 시절 친 나치 성향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언론의 의혹이 짙어지자 백발의 하러는 대중들 앞에 서서 자신의 과거를 시인했다. 그는 APA와의 인터뷰를 통해 "1938년 아이거 북벽 등반에 성공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환영접대와 개인적 헌정의 사진을 받음으로써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NSDAP)뿐 아니라 악명 높기로 유명한 나치친위대(SS)와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흔히 SS(Schutzstaffel)로 불리는 나치친위대는 1925년 아돌프 히틀러가 만든 소규모 개인경호대로 나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그 권력과 범위도 넓혀갔다. 처음에 300명도 안되었던 인원은 1933년 5만 명을 돌파했다. 나치친위대 출신들은 SA(Sturmabteilung)로 불리는 나치돌격대보다 우월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정치범, 집시, 유대인, 폴란드 지도자, 공산당 간부, 게릴라 저항군, 소련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해 악명이 높았다. 나치친위대가 되기 위해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완벽한 신체와 순수한 혈통을 가져야만 했다. 지리학을 전공한 엘리트이자 여행등반가였던 하인리히 하러는 나치친위대의 멤버가 될만한 월등한 조건을 갖고 있었던 셈.

 
▲ 하러의 소설 <부탄을 생각하며>.
ⓒ2006 Herbig
하인리히 하러는 그러나 "나는 나치친위대의 멤버로서 어떠한 행위도 한 적이 없고 1950년대 초반 티베트에서 귀향했을 때 이미 그라츠경찰서에서 그것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며 "내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음을 더 이상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오스트리아인들은 하러의 자백에 "노령의 나이에 부끄러운 고백을 하기는 쉽지 않다"며 그의 행동을 "매우 용기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미디어와 여론은 "그가 나치친위대 소속이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자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하인리히 하러는 전혀 부끄러운 오스트리아인이 아니다"고 평가했다.

하러는 또한 APA와의 인터뷰를 통해 나치친위대 멤버였다는 이유로 살아가는 동안 많은 고통과 협박을 받았음을 고백했다. 하러의 나치친위대증명서를 손에 넣은 그의 학교동문은 당시 3만 쉴링(약 270만원, 지금의 2180유로에 해당)을 요구했다. 하러는 그에게 차라리 증명서를 경찰서에 갖다 주라고 설득했다고. 또한 하러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비나치화위원회에 참석해 증언을 해야 하기도 했다.

하러는 자신이 등반가로 명성을 얻자 일정부분 나치의 프로파간다로 이용되었으나 돈도 훈장도 받은 게 없다고 밝혔다. 그는 나치돌격대의 고위간부 임명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으나 거절했다고 밝혔다.

"티베트에서의 7년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

 
▲ 하러의 자서전 <나의 인생>.
ⓒ2006 Ullstein
하러는 고국인 오스트리아에 돌아온 후 <티벳에서의 7년>을 비롯, <부탄을 생각하며> 등의 소설과 <나의 인생>이라는 자서전을 쓰는 등 글쓰기를 통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또한 고향인 휘텐베르크에 '티베트박물관'을 건립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제 3세계로의 여행을 통해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인권운동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하러의 가장 친한 친구인 14번째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는 하러를 만나기 위해 2번이나 휘텐베르크를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은 하러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1992년에 있었고, 두 번째 방문은 90번째 생일을 맞던 2002년에 있었다.

하러는 늘 "티베트에서의 7년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해왔다. 땅에 대한 관심으로 지리학을 공부했고 자연을 찾아 여행과 등반으로 늘 어디론가 떠났던 하인리히 하러는 7년도, 8년도 아닌 영원한 평온의 여정을 시작했다.

"나는 문명을 뒤로할 때, 안전하다고 느낀다."- 하인리히 하러

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배을선 기자는 비엔나국립대학교에서 극장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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