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8-05-21 01:14:18 IP ADRESS: *.235.169.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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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순간

명로진(방송인, 인디라이터)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원고 청탁을 받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생-순’ 은 떠오르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전교 1등을 했을 때?-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전교 1등 하던 놈들이 너무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 빵집으로 첫 미팅에 나갔을 때?-대학에 들어가 멋진 여대생들을 만나면서 그 순간은 잊혀졌다. 대학에 합격하던 날?-내가 왜 전공을 불문과로 정했는지 몰랐기에  나도 어머니도 결코 기뻐하지 않았다.

가만있자, 그럼 군 제대 하던 날?-오! 그래. 그 순간은 명징하다. 정말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더플 백을 매고, 적당히 긴 머리를 휘날리며(!) 부대 문을 나서던 순간, 마치 오랜 수감생활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가만. 근데 내가 무슨 부대에 근무했더라. 헉. 난 카투사였다. 주말마다 외출을 할 수 있었던 미군 부대에 복무했다.

그럼 첫 책이 나오던 날?-인세 때문에 출판사 관계자와 싸우던 기억 밖에 없다. 결혼하던 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그건 겨우 인생의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 낳던 날?-아빠가 된다는 감격이 있었지만 아이 울음소리가 ‘돈~돈~’으로 들렸다.

그럼 도대체 언제란 말인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있을지도 모른다. 맞다! 2002년 월드컵! 우리나라가 스페인을 물리치고 4강에 오르던 그날! 허정무 감독이 해설을 하면서 ‘와우 4강, 허허 4강’을 외치던 그날! 그때가 정말 내생순이었지!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나만의 순간이 아니다. 대한민국 4천 8백만 국민과 전 세계 5백만 동포에게도 최고의 순간이었다.  

오히려 월드컵 4강에 오르던 날은 국가대표 축구 감독 히딩크에게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히딩크는 늘 ‘나는 배고프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 탈보 와인 한 병과 맛난 요리도 그를 배부르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혹시 그가 월드컵 우승팀 감독이 된다면 모를까.

2001년 여름에 나는 촬영을 위해 안데스 산맥의 거봉 중 하나인 침보라소 베이스 캠프-4800m-에 있었다. 두 명의 현지 가이드와 방송 스텝들과 함께였다. 정상 등정 하루 전,  가이드 알레한드로는 나를 데리고 베이스캠프 옆 경사면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100여기의 묘비석들이 서 있었다. “로진. 이건 이곳 정상을 오르다 실종하거나 사망한 사람들의 비석이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많아? 그런데 우린 지금 정상 정복을 위해 나섰단 말이지? 세계적인 산악인 허영호 대장도 2주의 고도 적응 훈련을 하고 정상에 올랐던 그 봉우리를 향해 우린 3일만 쉬고 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탈이 났다. 스텝들이 고소증세로 픽픽 쓰러졌다. 가장 중요한 카메라 맨도 견디지 못하고 거품을 물며 까무라쳤다. 나 역시 눈이 빠지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결국 베이스캠프를 떠난 지 6시간 만에, 5천5백m 지점에서 돌아와야 했다. 우리 팀은 한동안 아무 말 없었다. 희박한 공기와 함께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실패한 원정 때문에 참담했지만, 어쩌면 그때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단한 성공이나 환희의 찰나도 없이, 죽다 살아온 기억을 최고의 순간으로 기록하자니 조금 부끄럽다. 자자, 솔직해 지자.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가슴 벅차게 느꼈던 ‘내생순’은.....없다. 그러나 앞으로 내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느껴야할 시각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다.

사고로 빨리 가든, 병으로 천천히 가든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때가 내게는 생애 최고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웃으며 생각할 것이다. 어린왕자의 옆 행성이었던 B615에서 이 지구로 놀러 와서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동안 너무 아름답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행복하게 놀다 돌아간다고.

월간 [행복한 동행] 200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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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8.05.21 01:17
*.235.169.165
참...심산스쿨 선생님들은 글들 참 잘 쓰죠?

로진, 그날...최고의 순간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최고의 결단을 한 건 맞아...
최고의 산악인?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야...
최고의 원정대? 떠날 때 인원 머릿수 맞춰서 웃으면서 돌아오는 원정대야...^^

양덕환

2008.05.21 03:44
*.38.137.49
명로진 선생님의 글도 깊이 와닿지만...
최고의 산악인?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야... 에 너무 꽂혀버렸네요... 햐...

강민정

2008.05.21 10:10
*.108.120.71
아... 눈물 난다...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때가 내게는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니...

최상식

2008.05.21 11:40
*.145.12.254
나도 안데스 가고 싶은데....^^
profile

명로진

2008.05.21 13:56
*.56.190.174
헉....그런가요?
퍼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강영

2008.05.21 18:23
*.190.131.37
와 너무 멋진 글. 제일 앞 문단 너무 공감이 되요... 1등을 한 적은 없었던거 같지만... 여하튼 계속 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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