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6-01-19 20:28:01 IP ADRESS: *.13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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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명칭 수선전도(부분) 제작자 김정호 규모 965mm☓694mm 재질 목판본 제작시기 1840년대


서울 인왕산 마애산행

 

마애산행 미륵기행

심산의 서울경기 바위유산 답사기 


심산 

 

인왕산(仁旺山, 338m)은 서울의 내사산 중 서쪽을 책임지고 있는 하얀 호랑이(右白虎)다. 인왕산을 호랑이라 칭하는 것은 여러모로 잘 어울린다. 예로부터 ‘인왕산 호랑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실제로 호랑이가 많이 출현했던 산이다. 하얀 호랑이라고 할 때의 ‘하얀’은 힘찬 근육질을 드러내고 있는 호랑이 뼈를 연상시킨다. 인왕산은 육산(肉山)이 아니라 골산(骨山)이다. 흙산이 아니라 바위산이라는 뜻이다.


인왕산의 골산미(骨山美)를 멋들어지게 표현한 진경산수화의 걸작이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와 강희언(姜熙彦, 1710-1781)의 [인왕산도]다. 두 작품 모두 그 안에서 꿈틀대며 하늘로 치솟는 하얀 바위들이 몹시도 인상적이다. 안견(安堅, 조선 초기)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풍경을 그린 것이다. 안평대군은 훗날 [몽유도원도]와 꼭 닮은 곳을 찾아내어 그곳에 정자를 세웠는데 그 위치가 바로 인왕산 북쪽 기슭 무계동이다. 이처럼 인왕산은 조선시대 내내 숱한 시인과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찬탄을 받아온 아름다운 산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산은 1968년 이후 한 동안 우리에게는 ‘오를 수 없는 산’이 되고 말았다. 바로 김신조 일당의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1993년 이 산을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무려 25년만의 일이다. 그 사이에 ‘회복 불가능한 파괴’도 일어났다. 197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전국미신타파운동’을 벌여 인왕산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숱한 절집들과 당집들을 대부분 헐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역사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들도 있다. 바위에 아로새겨진 선조들의 문화유산이다. 

  

김정호의 [수선전도] 속 옛미륵 자리엔 채석장이 들어서고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가 1840년대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수선전도]를 보면 인왕산의 서쪽, 홍제원의 위쪽에 ‘미륵(彌勒)’이라고 쓰인 커다란 글씨를 발견할 수 있다. [수선전도]는 매우 사실적인 지도다. 이 지도에 표시된 다른 항목들과 비교해보면 이곳에 있었다는 미륵의 규모가 대단히 방대했으리라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인왕산 마애산행은 이 미륵을 들머리로 하여 시작한다. 현재의 서대문구 홍제동 문화촌현대아파트 부근이다.


지하철 3호선 홍제역 1번 출구에서 문화촌현대아파트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1Km가 안된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그 중에서도 인왕산 자락에 가장 바투 붙어 있는 104동에 이르면 위쪽의 자그마한 공원(인왕산도시자연공원 쌈지마당 놀이터)으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을 찾을 수 있다. 계단을 오르면 돌연 시야가 넓어지며 낯선 풍경들이 펼쳐진다. 찬찬히 주위를 훑어보면 이내 알 수 있다. 예전에 채석장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작업을 멈춘 대신, 그 자리를 공원으로 꾸며놓은 것이다. 왼쪽 절벽을 올려다보면 그곳에 아름다운 마애불이 두둥실 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채석장 마애불’이라 부르고 나는 ‘인왕산 서미륵’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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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명칭 홍제동 채석장 마애불 심산별칭 인왕산 서미륵 규모 불상높이 약 2m 조성시기 근대 추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문화촌현대아파트 뒤편 인왕산도시자연공원 쌈지마당 놀이터 내

 

근래에 조성된 이 마애불은 물론 김정호가 표시한 그 미륵이 아니다. 나의 추측은 이렇다. 예전에 이곳에 커다란 미륵이 있었다. 하지만 채석장이 형성되고 발파작업이 계속되면서 그 미륵은 파괴되었다. 이를 죄스럽게 혹은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아마도 동네 사람들이거나 채석장 주인이었을 것이다)이 현재의 절단된 바위절벽에 새로운 미륵을 조성하여 옛미륵을 대체한 것이다. 인왕산 서미륵은 근래에 조성된 마애불들 중 드물게 아름답고 기품 있는 모습을 갖추었다. 왼손에 들고 있는 꽃봉오리와 도톰한 볼살이 편안하고 후덕한 인상이다. 이 미륵 아래의 공원에서 뛰어놀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쯤이야 너끈히 지켜주고도 남을 법하다.

 

비구니 사찰 환희사의 어여쁜 돌부처들

 

이제 인왕산 서미륵에서 산길로 올라타기 시작한다. 여느 동네의 야산과 다름없는 정겨운 오솔길이다. 인왕산 유아 숲체험장을 지나 계속 가벼운 능선을 밟으며 오르다 보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인왕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과 환희사로 빠져 내려가는 길이다. 우리는 후자를 선택한다. 길의 끄트머리에서 나무데크 계단을 밟고 내려서면 인왕아파트 사거리 쪽에서 올라오는 아스팔트 도로와 만나게 된다. 고개를 돌리면 환희사와 그 너머의 인왕산 주능선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조계종에 속해있는 환희사의 자세한 연혁은 알려진 바 없다. 내가 아는 것은 이곳이 비구니 사찰이며 매우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진 절이라는 사실뿐이다. 환희사 앞마당에 들어서면 예쁜 돌부처가 우리를 맞는다.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안내판도 없으니 편의상 이것을 ‘환희사 석조여래입상’이라 부르자. 이 역시 근래에 조성된 석불치고는 그런대로 볼만하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환희사에 들른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바로 환희사 용화전에 모셔져 있는 무명 마애불과 웃는 동자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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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명칭 환희사 마애불 심산별칭 모딜리아니 미륵 규모 불상높이 약 1m 조성시기 조선 후기 추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환희사 경내 용화전


꽤 두툼한 판석에 양각과 선각을 적절히 뒤섞어 새긴 이 무명의 마애불은 다소 마모가 되어있긴 해도 매우 아름답다. 주지 스님께 여쭈어보니 “예전의 큰 스님 꿈에 나타나 논두렁에서 업어왔다”고 한다. 미륵과 관련된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이다. 대웅전이 아니라 용화전에 안치한 것도 이것을 미륵이라 인식한다는 뜻이다. 동행들 중의 한 사람은 이 마애불을 보자마자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 여인을 떠올렸다. 어찌 보면 그런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마애불을 ‘모딜리아니’ 혹은 ‘모딜리아니미륵’이라고 부른다. 왼편 아래쪽에 협시하고 있는 ‘웃는 동자석’을 바라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허물어진 절터의 인왕산 산왕대신과 진모미륵

 

환희사에서 나와 다시 산쪽으로 접근하면 곧바로 [←옥동약수터 360m|청련사 380m→]라고 쓰인 이정표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청련사 쪽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답사대상인 무명 석불은 이곳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곳에 이르는 길 여기저기에 무속신앙의 흔적들이 그득하다. 바위에 세로로 만든 알터 겸 감실, 한때는 누군가의 수도처로 쓰였을 법한 작은 동굴과 샘물, 틀림없이 오방색의 끈들이 휘날렸을 법한 신령스러운 나무 등등. 무명 석불은 흥인약수터 옆 돌계단 위로 올라서야 만날 수 있다.


인왕산에는 유난히 약수터가 많다. 약수터가 있는 곳에는 의례히 절집 혹은 당집이 있었다고 보면 대체로 옳다. 절집이나 당집이 들어설 곳을 찾을 때 첫손가락에 꼽히는 조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샘물이 솟아나고 있느냐의 여부인 것이다. 인왕산을 가득 메우다시피 했던 그 많던 절집 당집들은 앞서 거론했던 김신조 사건과 미신타파운동의 결과로 모두 폐허가 되어 사라졌고 이제는 약수터만이 남아 그 터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무명 석불이 홀로 그 막막한 외로움을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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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명칭 인왕산 흥인약수터 석불 심산별칭 진모미륵 규모 불상높이 약 2m 조성시기 근대 추정 소재지 인왕산 흥인약수터 위


무명 석불 옆에는 ‘인왕산 산왕대신’이라고 쓰여진 검은 비석이 서 있다. 그래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이 석불의 이름이 그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훗날 동네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이 두 개의 석물은 별개의 것이다. 산왕대신이라고 쓰여진 검은 비석 역시 누군가 네 토막으로 박살을 내어 여기저기에 내팽겨쳐 둔 것을 동네 사람들이 가까스로 수습하여 현재의 위치에 수습하여 놓았다고 한다. 이런 끔찍한 만행의 현장을 볼 때마다 슬픔과 분노가 뒤엉켜 가슴이 답답해진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의 신성한 믿음의 대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분명한 범죄행위이며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이 한 가지 역사적 사실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우리에게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에, 유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에,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체계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산신신앙이다.


이 무명 석불에 내가 붙인 별명이 ‘진모미륵’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배우 주진모를 닮았기 때문이다(주진모씨는 행여라도 불쾌하게 여기지 마시기를. 물론 영화배우 주진모씨가 훨씬 더 잘 생겼다, 다만 인상이 비슷하다는 뜻일 뿐. 그 연장선상에서 나는 앞서 만났던 ‘환희사 석조여래입상’을 ‘진모여친’이라고 부른다. 이 두 석불을 마주 세우면 무척 잘 어울릴 듯하다). 진모미륵으로 가는 진입로 옆으로는 다시 돌계단이 나 있다. 나는 제법 긴 이 돌계단의 끝까지 올라서 보기를 권한다. 아마도 지금은 없어진 옛절의 산신각 터인 듯한데, 탁 트여진 전망이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이 산신각 터 뒤로도 인왕산 정상으로 향하는 버려진 옛길이 있다. 하지만 길도 희미할뿐더러 꽤나 험한 바윗길이어서 모르는 이들에게는 추천하기 어렵다.

 

인왕산 최고의 전망을 제공하는 기차바위길

 

이제 왔던 길을 거슬러 다시 환희사 근처 [←옥동약수터 360m|청련사 380m→]라고 쓰인 이정표까지 되돌아온다. 이번에는 물론 옥동약수터 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을 오른다. 비로소 본격적인 인왕산행의 시작이다. 오르는 길에 이따금씩 수풀 너머 능선 위로 저 유명한 기차바위가 보인다. 기차바위는 이 방향에서 올려다 볼 때라야 그 이름값을 한다. 칸칸이 나뉘어진 객실들은 물론이거니와 맨 앞에 달린 기관차 모양의 바위까지 그야말로 기차의 모습 그대로이다.


옥동약수터에 이르면 약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기를 권한다. 내가 두루 다녀본 바 인왕산 전체에서 가장 수질이 좋고 시원한 약수다. 약수터 주변을 상세히 살펴보면 꽤 커다란 굴이 보인다. 철조망으로 입구를 막아 놓았는데,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호랑이굴’이라고 부른다. 저 유명한 ‘인왕산 호랑이’의 집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다. 이 약수터 역시 예전에는 절터였음이 분명하다. 곳곳에 축대 혹은 산신신앙의 흔적들이 역력히 남아있다.


몇 개의 약수터를 지나 능선 위로 올라서면 이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방금 올라온 길이 홍제동 방면길이고, 오른쪽이 정상 방면길, 왼쪽이 홍지문(상명대) 방면길이다. 당연히 정상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얼마 걷지 않아 기차바위의 등 위로 올라타는 장쾌한 바윗길이 열린다. 바위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다소 아찔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양쪽으로 철제 난간을 잘 설치해놓아 안전한 길이다. 인왕산 전체를 통털어 가장 멋진 전망의 파노라마를 선사해준다. 특히 왼편의 백악(북악산)과 그 아래 청와대 그리고 그 너머 서울의 고층건물들을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이다.


기차바위를 뒤로 하고 계속 걸으면 곧 한양도성(서울성곽)길과 만난다. 한양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처음 올려다보게 되는 바위가 치마바위다. 치마바위 옆으로 난 계단길을 올라가면 곧 인왕산 정상이다. 이 부근에서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답사대상인 석굴암은 여기서 동쪽사면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즉 기차바위를 지나 한양도성 안으로 접어든 다음,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길에 도착하기 전에, 왼쪽 사면으로 나 있는 샛길을 찾아 방향을 틀어야 한다(그 어떤 이정표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이 곤란하다. 석굴암으로 가는 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금처럼 산 능선에서 내려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산 아래 도로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인왕산 밑자락을 휘감고 도는 자동차 도로와 수성동계곡에서 올라오는 길이 마주치는 지점에 [석굴암]이라고 쓰여진 이정표가 있고 그 옆에 군인초소 및 출입구가 있다. 이곳에서 돌계단길을 따라 계속 올라오면 곧 석굴암이다).

 

석굴암의 마애산신도와 인왕산 동미륵

 

인왕산 동쪽사면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석굴암은 글자 그대로 바위굴로 이루어진 절이다. 천연의 바위들로 이루어진 요새와도 같은 곳이었기에 1968년과 1978년에 연달아 자행된 사찰철거작업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새로 조성한 석불 3기를 안치한 본당(대웅전이라 볼 수 있다)도 나름 볼만 하지만 나를 특히 매료시킨 곳은 다름 아닌 산신단이다. 따로 건물을 지은 것은 아니고 자연석의 바위에 마애산신도를 새긴 곳인데, 현재에는 어설픈 비닐 가건물로 에워싸고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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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명칭 인왕산 석굴암 산신단 규모 가로 세로 약 60cm 조성시기 근대 추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석굴암 경내


산신도는 흔하지만 마애산신도는 드물다. 게다가 몇 안 남아있는 마애산신도들 중에서도 그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은 더욱 찾기 힘들다. 그런 맥락에서 석굴암 산신단에 남아있는 마애산신도는 각별한 존재다. 구름 모양의 눈썹을 달고 있는 호랑이의 표정은 익살스럽고, 복숭아를 공양하려 하는 동자승의 표정은 사랑스러우며, 편안한 자세로 앉아 수염을 가다듬고 있는 산신(령)의 표정은 온화하다. 자연석의 바위에 액자 모양의 감실을 파고 조성한 이 마애산신도 옆에는 조성자와 조성시기 등을 밝힌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들은 이곳을 ‘산신단’이라고 불렀고, 불기 2984년에 조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데 저 불기 2984년이라는 조성시기는 조금 의아하다. 일반적으로 서기에 544년을 더한 해를 불기로 잡는다. 그러므로 불기 2984년이라면 서기 2440년이 된다. 아마도 저들은 다른 불기를 사용하고 있거나 단순한 착오일 듯 싶다).


석굴암을 등지고 섰을 때 왼편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또 다른 암자(터)를 볼 수 있다. 바로 천향암이다. 현재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고 오직 바위문화유산들만이 산재해 있다. 신령한 바위와 샘물, 이것이 우리 민족의 오래된 기도처의 최소요건인데, 현재의 천향암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형태를 소박한 원형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세 번째 요건을 꼽는다면 동굴이었다. 신령한 바위-샘물-동굴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곳이 석굴암이다. 이 오래된 민속신앙의 터전에 불교가 유입되면서 마애불이 새겨지고 절집이 들어섰던 것이다.


석굴암을 등지고 섰을 때 오른편 모롱이를 돌아가면 곧 마른 계곡이 나타난다. 그 계곡을 넘어 다시 한 모롱이를 돌아가면 뜻밖에도 거대한 마애미륵불이 우리를 맞는다. 인왕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마애불 옆에는 ‘미륵존불’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뜨게 뜬 눈, 그리고 자신감이 느껴지는 입술선과 턱선 등으로 매우 남성적인 느낌을 준다. 그 어떤 기록도 남겨져 있지 않아 조성시기를 짐작해보기가 쉽지 않지만, 조각기법으로 보아, 아마도 조선 말기에서 20세기 초중반 사이에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이 강인한 인상의 선각마애불을 나는 ‘인왕산 동미륵’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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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명칭 인왕산 석굴암 미륵존불 및 산신각 심산별칭 인왕산 동미륵 규모 불상높이 약 2.5m 조성시기 근대 추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석굴암 인근


인왕산 동미륵 옆에는 또 다른 마애산신도가 새겨져 있다. 앞서 살펴본 석굴암 산신단의 그것이 선각으로 되어 있다면, 이곳의 산신도는 양각(부조)으로 되어 있다. 안타까운 점은 산신(령)과 동자승들의 얼굴 부분이 많이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해학적인 표정의 호랑이만은 그 멋진 꼬리를 하늘로 치켜세운 채 완전한 자태로 남아있다. 이 산신도 옆에는 ‘산신각’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결국 인왕산 석굴암에는 두 개의 마애산신도가 있는 것이다. 산신단에는 마애선각산신도가, 산신각에는 마애부조산신도가. 이 숨겨진 산신도에도 남 몰래 찾아오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지 아직도 여기 저기 소원을 빌며 붙여놓은 동전들이 여럿 보인다.

 

단경왕후가 치마를 펼쳤다는 바위에는 암벽등반가들이 길을 내고

 

인왕산 동미륵의 머리 위쪽으로 넓고 가파르게 펼쳐진 바위가 치마바위다. 이곳에서 직접 치고 오르는 길도 있지만 일반인들은 갈 수 없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나와 인왕산 주능선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치마바위의 전모를 볼 수 있다. 연산군을 친위 쿠데타로 몰아냈던 중종반정(1506년) 직후 폐위된 단경왕후가 경복궁 안의 남편(중종)을 그리워하며 매일 자신의 치마를 펼쳐놓았다 하여 ‘치마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치마바위의 위치 및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으로 미루어 충분히 개연성 있는 스토리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선입견 없이 바라봐도 치마바위는 치마바위다.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바위의 모습 자체가 마치 고운 한복을 입은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너울거리며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중반까지 암벽등반의 대상지였다. 현대 한국에서 암벽등반이 대중화되기 전, 그러니까 북한산의 인수봉이나 도봉산의 선인봉 등이 다양한 루트로 개척되기 전, 이곳 인왕산 치마바위는 암벽등반가들의 등용문이자 연습장이었다. 당시 이 바위선배들이 개척해놓은 루트가 아직도 예닐곱 개 남아있다. 인왕산이 다시 민간에게 개방된 이후, 지금도 인근 군부대에 미리 사전신고를 하면 암벽등반이 가능하긴 한데, 찾는 이가 별로 없어 버려진 암장이 되었다.


치마바위를 옆으로 끼고 설치되어 있는 나무계단을 밟고 오르면 그곳이 바로 인왕산의 정상(338m)이다. 정상 부근에는 자연석에 인위적으로 둥근 홈을 만들어놓은 알바위들이 즐비하다. 모두 다 민간신앙의 흔적들이다. 서울 우백호의 정상에 오르니 당연히 사위는 탁 트인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서울의 내사산과 외사산 모두를 빙 돌아가며 감상할 수 있다. 하산길은 서울성곽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다. 이곳에 주둔했었던 군인들이 워낙 돌계단과 철제 난간 따위를 잘 만들어놓아 안전한 대신 재미는 없다. 이 길을 끝까지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 오른쪽으로 빠진다. 군초소 앞에 성곽 밖으로 나가는 출구와 나무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선바위 계곡의 제석님과 남산에서 이전된 국사당

 

국사당과 선바위 사이로 작은 계곡이 흐른다. 이곳을 나는 편의상 ‘선바위 계곡’이라 부른다. 좁은 오솔길이 이 선바위 계곡을 끼고 인왕산 정상부를 향하여 올라간다. 우리의 다음 답사지는 이 계곡길의 제일 윗부분에 있다. 성곽을 빠져나온 뒤 계속 오른쪽으로 우회하면 가 닿을 수 있다. 가는 길 내내 바위신앙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요즘에도 그 영험한 바위들 앞에 떡 벌어진 제사상을 차려놓고 무언가를 기원하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공권력이 그토록 탄압하고 축출해도 민간신앙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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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명칭 인왕산 선바위계곡 제석 심산별칭 인왕산 할미 규모 불상높이 약 50cm 조성시기 근대 추정 소재지 인왕산 선바위계곡 최상단


계곡길의 상단부에는 철거된 절집 혹은 당집들의 터가 많다. 그 중의 제일 윗집 마당에 들어서면 바위 한 켠에 자그맣게 새겨져 있는 앙증맞은 마애불을 볼 수 있다. 동네 사람들은 ‘제석님’ 혹은 ‘제석이’ 심지어는 ‘대석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민간신앙 혹은 무속신앙에서 말하는 제석(帝釋)을 형상화한 듯한데, 내 눈에는 그저 마음씨 곱고 예쁘게 늙은 동네 할머니 같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귀여운 마애불을 ‘인왕산 할미’라고 부른다. 한때의 당집이었던 까닭에 마당이며 반석도 잘 다듬어져 있어 한 동안 목을 축여가며 쉬어가기에 그만이다.


계곡길의 하단부에 저 유명한 국사당이 있다. 본래의 국사당은 남산의 정상부에 있었는데, 1925년 일제가 그곳을 침탈하여 자신들의 신사를 세우면서 이곳 인왕산으로 내쫓은 것이다. 남산의 산신인 목멱대왕과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를 모시던 조선시대 최고의 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오자 그 이전부터 인왕산을 주무대로 활약해오던 무속인들은 오히려 용기백배하였다. 그 결과 선바위에 덧붙여 국사당까지 얻게 된 인왕산의 남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울지역 무속신앙의 메카로 남아있게 된다. 현재의 국사당 안에는 서울특별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무신도 21점이 진열되어 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 그리고 선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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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명칭 선바위 규모 바위높이 약 4m 문화재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 4호

 

인왕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당연히 선바위다. 이 신령스러운 바위에 스토리텔링이 없을 수 없다. 한양도성을 축조하기 직전의 일이다.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시킬 것인가 제외시킬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붙었다. 선바위를 불교의 성지로 인식하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포함시키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교세력을 견제하려던 정도전은 결사반대했다. 태조 이성계는 묘한 중재안을 내놓았다. “눈이 내린 다음 눈이 녹는 선까지를 도성 안에 포함시키자.” 결과는? 선바위가 있던 곳의 잔설(殘雪)은 끝내 녹지 않아 결국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믿거나 말거나’식 스토리텔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굳이 검증해 보겠노라며 소매를 걷어붙일 필요는 없다. 그저 조선 개국 초기에 불교세력과 유교세력 간의 헤게모니 싸움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위의 ‘눈 녹은 선’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은 북한산 인수봉에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서울이라는 명칭 자체가 이것과 관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곧 눈 ‘설(雪)’자와 울타리를 뜻하는 ‘울’자가 합쳐져 ‘설울’이 되었다가 그것이 ‘서울’이라는 순 우리말 이름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한자로 선(禪)바위라고도 하는데, 굳이 불교적 용어인 선(禪)자를 쓴 것은, 그 모양이 “스님 두 분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서”라고 한다. 어떤 이는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고도 한다. 나의 의견은 다르다. 선바위는 그저 선돌, 굳이 한자로 표현하자면 입석(立石)일 뿐이다. 이 바위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유입되기 훨씬 전부터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다. 한양 일대에서 ‘가장 영험한 바위’로 알려진 이 바위는 자식 얻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올려 ‘기자암(祈子岩)’이라 불리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선바위는 오늘날 인왕산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인왕산의 남쪽을 묵묵히 지키는 동네 할아버지

    

9.JPG

비공식명칭 인왕산 마애불 심산별칭 인왕산 남미륵, 인왕산 할배 규모 불상높이 약 2m 조성시기 근대 추정 소재지 인왕산 선바위 인근


인왕산 마애산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선바위에서 멀지 않다. 선바위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져 동네 안쪽의 골목길로 접어들면 [무악공원150m>>]라는 둥근 표지판이 보인다. 인왕산 남미륵은 무악공원까지 가기 전에 만날 수 있다. 자연석의 바위를 슬쩍 파고 들어간 다음 기존 바위의 굴곡을 이용하여 결가부좌 형태의 석불을 조성하였는데, 완고하달까 무표정한 얼굴에 아랫배도 살짝 나와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다. 이 마애불 역시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근래에 조성된 듯 싶다.


나는 이 마애불을 ‘인왕산 남미륵’ 혹은 ‘인왕산 할배’라고 부른다. 삶에 지친 듯 혹은 모든 것을 체념해버린 듯 완고한 표정의 얼굴이 흡사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우리네 옛 할아버지들 같다. ‘인왕산 할배’라는 별칭은 물론 ‘인왕산 할미’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 무표정한 할배 마애불이 선바위 계곡 끝자락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어여쁜 할미 마애불을 만난다면 활짝 웃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무악공원 쪽으로 내려가면 곧 ‘인왕산인왕사’라고 쓰여진 일주문 앞 광장이다. 최근 신축된 아이파크 아파트 옆길로 줄곧 내려가면 오래지 않아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으로 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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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16.01.20 14:58
*.139.1.130

바위에서 길을 찾고 정상에 올라서는 일은 내가 평생 동안 해왔던 짓이다

무언가 다른 패턴의 산행 혹은 여행은 없을까?

수년 전부터 내가 붙들고 있는 새로운 화두다

 

수년 간의 모색과 공부, 그리고 현장답사 등을 통하여

이 ‘새로운’ 산행 혹은 여행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바로 [마애산행 미륵기행]이다

 

전체 6권의 단행본 시리즈로 기획되었다

시리즈 전체의 큰 제목은 [마애산행 미륵기행]이고

4권의 단행본은 지역별로 나뉜다

서울경기권, 강원충청권, 전라권, 경상권

다시 이들은 섬머리하여 핵심만을 추려낸 후

[한국마애산행]과 [한국미륵기행]이라는 제목으로 2권을 더 낸다

 

현재 ‘서울경기권’은 자료조사, 현지답사, 사진촬영 및 정리 등이

95% 정도 완료된 상황이고

‘강원충청권’은 5% 정도 진척된 상황이다

 

아직 집필은 시작하지 않은 상태인데

뜻밖에도 신문연재 제안을 받았다

[한겨레]에서 서울권만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주간신문을 창간할 예정인데

그 지면에 연재할 수 없느냐고 물어온 것이다

아직 피아간의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단 SAMPLE 삼아 원고 한 꼭지는 완성했다

그것이 위에 올린 ‘서울 인왕산 마애산행’이다

 

원고를 쓰고 보니 몇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일단 이 원고는 너무 길다(거의 200자 원고지 80매 분량이다)

이렇게 긴 원고를 신문에 연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원고들을 모두 실으려면 신문의 2면을 꽉 채워야 한다

 

매주 이렇게 긴 원고를 쓸 수도 없다

인왕산은 이만한 분량이 되지만 가령 개화산은 이에 비하여 턱 없이 짧다

즉 대상 아이템에 따라 원고의 분량이 달라지는 것이다

결국 신문연재는 포기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위의 원고에서 대상을 찾아가는 길의 묘사....같은 것은

별도의 칸으로 뺄 수도 있다

가령 단행본의 지면을 염두에 둔다면

방주(각주가 아니라 방주, 곁 방자를 쓴다)로 따로 분리하여 편집하는 것이다

사진도 더 많이 사용하고 싶다

하나의 마애불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적어도 앵글을 달리하는 사진을 3~4개쯤 실어야 한다

당연히 빅클로즈업 사진도 필요하다

중요한 이정표의 사진도 싣고 싶다

내가 답사할 때 너무 길을 잃고 고생을 하였으므로

나 이후에 오는 답사자들에게는 친절하게 소개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대로 단행본을 만들 수 있다면

매우 복잡한 작업과 많은 정성을 쏟아야 되겠지만

그 결과 ‘매우 독창적인’ 한국산행기 혹은 한국여행기가 될듯하다

그렇다 전혀 새로운 산행루트를 개척(?)하고

전혀 새로운 여행루트를 제시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이 작업에 남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쓰게 된다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는 꼭 해야될 일이고, 누구보다도 내가 잘 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이 작업을 너무 재미있어 하기 때문이다

 

이 [마애산행 미륵기행]의 모든 작업이 끝나면

그 연장선상에서 다른 책들도 쓰고 싶다

가령 [한국동천기행][한국구곡기행][한국폭포기행][한국마애각문순례][한국산성기행] 등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산이란 무엇인가][바위란 무엇인가][한국의 산신을 찾아서] 등

 

아니, 다 좋은데...그러면 도대체 소설은 언제 쓰지?

안된다, 반드시 써야한다!

위의 책들을 집필하는데 올인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장편소설을 완성해야 되겠다!

김주영

2016.01.28 06:33
*.190.18.70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다. 나도 글은 못쓰지만 한국의 산성,옹성,돈대등을 찍어 아카이브를 만들고 있긴하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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