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3-05 23:10:41 IP ADRESS: *.147.6.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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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캄보디아가 그립다 알포인트에 이름 새긴 공수창 감독
[필름 2.0 2004-09-24 21:10]

영화로 세상을 바꿔보겠노라며 젊음을 불태웠던 <파업전야>의 공수창이 오랜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거쳐 <알포인트>로 감독 데뷔했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지나간 일에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간다.

한승희(이하 '한') 축하 인사 많이 받았겠다.

공수창(이하 '공')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전화가 있었나?

축하 전화보다는 ‘쓴소리’를 한 전화가 기억에 남는다. 우선 아버지께 받은 전화.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던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셨다. 또 영화를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 ‘주말의 명화’도 함께 보고 극장도 같이 갔다. 군인이자 영화광인 아버지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알포인트>를 보시고 한동안 서먹했던 아들에게 전화를 하셨다. 이 영화를 내심 아버지께 헌정하는 마음으로 찍었는데, '아쉽다'는 말을 들었다. 한편으로 뿌듯했고 한편으론 좀 더 잘할 걸, 하는 생각을 했다. 또 한 통의 전화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한테 받은 것이었다. 실랄한 비판이 10분 이어졌다. 자신은 자유 수호를 위해 베트남에 갔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모든 인내력을 동원해서 받아야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구나. 내가 너무 자만했구나. 굉장히 어렵게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전화를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기도 했다.

주성철(이하 '주') 흥행도 되고, 반향도 커서 뿌듯하겠다.

보답이 되고도 남는다.(웃음) 어떨 때는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다. <알포인트>에 너무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작가일 때는 몰랐는데 감독의 위치란 정말 다르구나 새삼 느낀다.

워낙 고생을 많이 한 영화라고 알려져서 그 때문에 후한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하나?

꼭 그렇지는 않다. 색다른 시도를 했다는 것에 대해 점수를 준 것 같다. 작년이나 재작년에 나왔으면 이런 평가를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올해 나온 공포영화들이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상대적으로 참신한 인상을 줬던 것 같다.

개봉이 연기된 게 오히려 득이었다.

공정하게 얘기한다면 영화의 완성도보다는 후한 점수를 준 것 같다.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고 다음 행보가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처음이라 봐준 것도 있는 것 같고.

처음이라고 잘 봐주지는 않는다.(웃음) 주변에 친한 감독들이 많으니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잘 알고 있지.(웃음)

데뷔작에 대한 지적은 대체로 비슷하다. 감독 전력에 비추어 약점을 꼬집는 것이다. CF나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은 한결같이 드라마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 출신은 영상적인 전개나 테크닉에 대한 지적이 많다. <알포인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러 비평 중에서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라고 믿을 수 없게 단조로운 인물 구성과 느슨한 이야기’라고 했던 정성일의 평은 상당히 당황스럽게 느껴졌을 법하다.

솔직히 뜨끔했다. 내가 이야기꾼인데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말 아닌가. 시나리오상에서는 캐릭터에 대한 굴곡들이 있었는데 영화로 찍고 편집하면서 많이 없어졌다. 세련되게 숨기고 싶었는데 그 부분이 들통난 거다. 평을 쓴 정성일 선배, 피도 눈물도 없는 평론가 아닌가. 그래도 그 정도로 써준 게 나와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나도 정 선배가 영화를 만들면 평을 한번 해야겠다는 마음이 불끈 생겼다.(웃음)

<알포인트>는 두 명의 감독이 교체된 후 어쩔 수 없이 연출을 수락한 걸로 알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데뷔작이었다고 생각하나?

그렇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사실을 자기 합리화를 위한 방패막으로 썼던 것 같다. 너무나 느닷없이 연출을 맡았기 때문에 이것 밖에 못했다. 현장이 너무 열악했다. 그러니까 이해해 달라. 솔직히 그런 마음이 있었다.

장윤현 감독(<접속><텔미썸딩>의 감독이자 <알포인트>의 제작사 씨앤필름의 대표)이 뭐라며 연출하라고 꼬시던가.

"이건 형의 영화다. 형이 개발한 아이템이고, 형이 쓴 시나리오다. 3년 이상 이 영화를 팠는데 그냥 시나리오 대로 찍으면 된다. 자신감을 가져라"고 말했다.

감독이 마음의 준비도 안 됐고, 해외 로케이션하는 전쟁영화인데 나중에 다른 영화로 데뷔하라며 말리는 사람은 없었나.

없었다. 내가 "이거 해야 되나?"하니까 박찬욱 감독은 "형, 웃기지 말고 해"라고 말했다.(웃음) 감독 기회가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니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하라고 했다. 캄보디아로 떠나기 전에 박 감독이 일부러 시간 내서 조언도 많이 해줬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현장에서 절대 화내지 말라"는 주문이었는데 그 말이 도움 많이 됐다.

촬영하면서는 그때 뜯어 말리지 않고 등 떠민 사람들을 저주했다던데.

난 시나리오만 썼어야 했어, 라는 생각을 매일 밤 했다. 캄보디아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게 상상 외로 힘들었다. 그 누구와도 연출 문제로 얘기할 상대가 없었다. 굉장히 섭섭했던 게 뭔가 하면, 사정상 촬영을 쉬면 스탭들은 휴강이나 휴가를 맞은 것처럼 좋아했다. 난 놀지도 못하고 밀린 일정으로 머리만 엄청 아픈데 스탭들은 오토바이 빌려서 놀고, 술 먹고, 포커 치는 거다. 밤샘 촬영 끝나고 새벽에 숙소로 돌아올 때면 나 혼자 걸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다들 삼삼오오 이야기하면서 숙소로 가는데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거다. 시나리오 쓸 때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를 보면 '가장 가까운 사람도 내 짐은 못 덜어주는구나, 세상은 혼자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감독을 하면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웃음)

시나리오 쓸 때 좋았던 부분이 나중에 촬영할 때도 좋던가?

아니다. 처음 연출하려고 하니까 내가 이 시나리오 쓴 사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딱 그 신만 생각나는 거다. 앞뒤 신이나 상황, 배우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연결이 되는지 등등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촬영 초반 필름이 세관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촬영하기도 전에 조명 스탭이 다리를 다쳐 한국으로 돌아가고,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정말 5회차까지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현장에서 부딪히는 일이나 사람 중에 가장 힘든 게 뭐였나.

아무래도 배우가 가장 어렵다. 감정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가 앞뒤 연결 생각하지 못하고 허둥거릴 때 배우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준 점은 참 고마웠는데 너무 챙겨주지 못한 것 같다. 촬영 끝나면 같이 술도 한잔해야 하는데 워낙 준비 없이 시작하다 보니 당장 내일 촬영 준비를 해야 해서 어울릴 시간이 부족했다. 다행히 손병호 씨가 맏형 역할 해가며 많이 다독여줘서 큰힘이 됐다. 중반 이후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풀어졌다.

인터뷰도 중반 이후 분위기가 풀어지는 것 같다.(웃음) 처음에는 낯가림이 심했다.

나는 잘 모르는데 사람들이 성격이 폐쇄적이란 말을 많이 한다. 혼자 쳐박혀서 글쓰다 보니까 성격이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영화제나 제작 발표회에도 잘 가지 않고 공개석상에 나서는 걸 꺼리는 편이다. 그러고 보면 심산(<비트> <태양은 없다>)이나 김대우(<정사>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작가는 시나리오 쓰면서도 어쩜 그렇게 활동적인지 몰라.

산에 다녀봐라. 심산 작가처럼.(웃음)

나도 캄보디아에서 <알포인트> 찍으면서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웃음) 처음에는 겁이 많이 났다. 아무래도 계속 사람들과 부딪히며 풀어야 하니까. 한편으로는 한번 부딪혀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두려움과 해보자는 마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촬영했던 것 같다.

이제 개봉도 끝나고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DVD 출시 준비는 하나?

지금은 <알포인트>를 잊어보려고 한다. DVD도 감독 코멘터리 없이 그냥 가려고 한다. 캄보디아 촬영 중에 메이킹 만드는 친구가 몇 번 인터뷰 요청했는데, 지금은 그거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미루다가 결국 한번도 못하게 됐다. 음악만 해도 그렇다. 누군가 현장에서 "이 장면은 음악을 생각하면서 찍어야 한다"고 말하면 "내가 지금 음악 고민하며 찍게 생겼어"라고 대꾸할 정도였다. 영화 찍으면서 음악에 대해 고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서 후반 작업하면서 달파란 음악감독이 어떤 음악 들어갔으면 좋겠냐고 물을 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잘 좀 해주세요’"라는 말 외에는 정말 얘기할 게 없었다.

영화 찍으면서 음악을 전혀 안 들었나?

캄보디아에 가서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책도 CD도 안 갖고 갔다. 달랑 시나리오와 콘티 북뿐이었다. 한 달 정도 지나니까 톡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건조해졌다. 나와 방을 같이 썼던 현장 편집 기사가 MP3로 음악을 좀 녹음해 와서 비지스 노래를 들었다. 비지스 노래를 들으며 주요 촬영지인 복코산 저택을 거닐던 기억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공수창’이 본명인지 궁금하다.

본명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름 때문에 수모를 많이 겪었다. 지금은 우리 애들이 겪고 있고.(웃음) 난 초등학교 때 신학기가 거의 공포였다. 출석 부를 때 공수창 하면 애들이 막 웃는다. 평범한 이름도 공씨가 붙으면 코미디가 된다.

인정옥(<여고괴담> <네 멋대로 해라> <아일랜드>)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인진미 감독이 연출하는 <그대와 함께>라는 코믹 공포영화의 줄거리를 본 적이 있는데 남자 주인공 이름이 공수창이고 여자 주인공 이름이 임청하더라. 당신과 관계가 있는 캐릭터인가?

뭐라고? 내 이름을 썼다니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담판을 져야겠다.(웃음) 캄보디아로 떠나기 전에 TV 드라마 <폭풍 속으로>를 쓴 최완규 작가가 성지루 씨 배역 이름을 공수창으로 하겠다고 전화를 해서 꼭 바꿔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는데 돌아 와서 보니 그냥 나갔더라. 다행히 그 드라마가 히트를 못 쳤다.(웃음) 그런데 내가 인정옥 작가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좋은 의도이든 나쁜 의도이든 이거 참… .

작가들은 예명도 많이 쓰던데 그럴 생각은 없었나?

난 좀 그게 가식적으로 느껴지더라고….

그럼 <하얀전쟁>에 공수영이라는 예명을 쓴 이유는 뭔가?

내가 ‘<파업전야> 작가’라는 꼬리표를 10년 넘게 달았다. 정지영 감독이 <남부군>을 찍고 <하얀전쟁>을 하게 됐는데 감독이 하는 말이 "내 전력 때문에 검열에 문제가 있을 거 같다. 시나리오 작가까지 <파업전야> 출신이라고 하면 선입견이 커질 것 같다"며 예명을 공수영으로 하는 게 어떻겠나고 했다. 내가 "이름을 바꾸려면 확 바꾸던지, 공수창이나 공수영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면서도 이미 알려진 감독이 이름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내가 따랐던 거다. 하여간 난 ‘<파업전야> 쓴 공수창’으로 너무 떴다. 이런 얘기를 해선 안 되겠지만 나중에는 그 이름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나한테는 영예로운 훈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따라다니다 보니까 나를 잠식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파업전야>는 언제 마지막으로 봤나?

처음 시사할 때 보고 안 봤다. 후반 작업 다 끝내고 신촌에 있는 어느 작은 소극장을 빌려 상영회를 가졌는데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개인적으로 <파업전야>보다는 <오! 꿈의 나라> 시나리오에 더 애착이 간다.

그러고 보니 장윤현 감독과는 오랜 인연이다.

한양대 후배지만 영화적으로는 선배다. 씨앤필름의 최강혁, 이창준 프로듀서도 한양대 영화동아리 소나기 시절에 만났다.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다시 한양대에 들어갔는데 그때 만난 인연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

운동하다 잘린 건가?

운동이라고까진 할 건 없고 1980년 서울의 봄(박정희의 사망으로 18년 군사독재에 종지부를 찍자 학원가를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크게 일었다) 때 데모하다가 휩쓸리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그때 굉장히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났다. 2, 3년 정도 학교와 상관 없이 떠돌며 지냈다.

어디를 떠돌았나?

그때 나에게 가장 큰 스승은 황석영 작가다. 그의 삶을 모방하려고 노력했다. 탄광에서도 일해보고 오징어잡이 배도 타보고 했다.

황석영 외에는 어떤 작가들을 좋아했나?

김승옥. 그리고 독특하게 이어령 씨의 글도 다 찾아봤다. 당시 나는 어떤 글을 읽고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 버릇이 있었다. 외국 작가로는 헤밍웨이, 레마르크를 좋아했다.

문학을 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국문과에 입학한 건가?

아픈 기억이 좀 있다. 음... 1982년 당시 나는 속초에서 하는 일 없이 여인숙 신세를 지고 살았다. 그래도 신춘 문예는 꼭 챙겨봤는데 한 일간지 소설 부문에 친구가 당선된 걸 봤다. 그 친구의 소설을 읽고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다. ‘친구는 소설가가 됐는데 난 여기 고여서 썩고 있구나.’ 그때 쓴 일기를 보면 달려오는 파도를 보며 어쩌고 저쩌고, 보던 신문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어쩌고 저쩌고, 바다에 버린 게 어디 신문지뿐이랴, 뭐 그런 얘기가 적혀 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나도 빨리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걸 성취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 친구가 서울로 돌아오는 힘이 됐다. 다시 대학 시험을 보게 됐고 그게 없었으면 아마 계속 그렇게 지냈을 거다.

이후에도 그런 질투심을 느낀 적이 있었나?

그 후로는 그런 종류의 질투심과 좌절을 느껴보지 못했다. 물론 시나리오를 잘 쓰는 감독들을 보면 샘이 나기도 했다. 이명세 감독이 쓴 <첫사랑>의 초고를 읽었을 때 엄청 질투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영화를 보니까 시나리오와 좀 달라졌다. 장선우 감독도 한때 그랬고. 박찬욱 감독의 경우 예전에 같이 작품을 준비했던 적이 있는데, 영화로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정말 대사를 잘 썼던 것 같다.

아직도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은 있나?

지금은 아니다. 이젠 소설에 대한 열정을 없어졌다. 신춘 문예 당선작도 몇 년 전부터 안 본다. 단지 1970년대 화려한 꽃을 피우던 문학계에 최인호, 이청준, 황석영 같은 작가가 있었고 2000년대 한국 영화계에도 그런 작가와 감독이 있다면 내가 그들 중 한 명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다. 문학은 이제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거다.(웃음)

80년대의 기억이나 체험이 일하는 데 있어 여전히 중요한가?

물론이다. 지금껏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하면서 내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 건 쓸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게 내 한계일 수도 있는데 그런 성향은 아마 끝까지 갈 것 같다. 사실 <알포인트>를 통해서도 기득권층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국회 시사를 한 것도 그렇고. 저런 군인들은 바로 당신들이 보냈고, 이라크에도 보냈으니까 그들이 이런 아픔을 겪지 않게 노력해 달라고 말이다. 영화가 반향이 있긴 하지만 기대만큼 반전이나 그런 메시지는 별로 없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이나 <링>같은 영화는 그런 가치관에 부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은 ‘나도 이런 거 쓸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 썼던 영화다. 내 가치관과 맞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재미나게 썼던 영화다. 문학적이지 않은 시나리오 쓰기를 막 깨우치던 시기였다. 깔끔한 멜로드라마를 쓰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링>은 원작이 있어서 의외로 쉽게 썼다. 내가 쓴 시나리오 중 가장 짧은 기간에 썼고 시나리오에 대해서 제작자나 감독도 많이 만족했던 영화다. 그 좋았던 기억과 호흡이 <알포인트>까지 왔는데 <링>의 김동빈 감독이 <알포인트>에서 도중 하차하면서 깨지긴 했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끝나고 바로 <링>으로 넘어갔는데 자신감이 꽤 있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치기 어리기도 했고. 한 고개 넘었다고 자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작가로서의 이름값이나 경력에 비해 작품 편수가 좀 적은 느낌이다. 뚜렷한 공백기도 있었고.

일단 내가 활동적이지 않아서 의뢰가 들어오는 곳이 한정돼 있다. 중간에 하차한 작품도 꽤 많다. 또 내가 게을러서 의뢰를 받지 않으면 잘 쓰기 시작하지 않는다. 써서 비축해 놓았다가 넘기는 스타일도 아니다. 90년대 중반 공백기에는 영화에 대한 회의 같은 게 좀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때 ‘아, 영화가 어떤 거구나’ 하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련기라고 할까? 4년 정도는 거의 작품도 안 하고 비디오만 빌려서 봤던 기억이 난다. 거의 매일 비디오 빌려보는데 어떤 영화는 봤는데도 또 손이 가고, 어떤 영화는 보고 싶기는 한데 손이 안 가는 영화들이 있었다. 왜 그런 걸까 고민하다 보니 ‘영화적인 것’이 뭔지 알게 됐다. 장르 영화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던 시기였다.

그때 손이 자주 갔던 영화들은 어떤 작품들이었나?

데이비드 린 감독 영화가 좋았다. 코폴라 감독도 주요 대상이었고. 소설도 작가별로 섭렵해서 그런지 영화도 감독을 따라 보게 되더라. <알포인트>도 전혀 의식을 안 했는데 나중에 보면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앵글이 많이 보이더라. 굉장히 도움이 됐던 영화들이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사운드 오브 뮤직> 노래를 따라 부를 정도로 즐겨 봤다.

젊은 문학도가 영화 운동 시기를 거쳐 늦깎이 감독까지 됐다. 중간에 힘들 때도 많았다는데 영화를 계속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나? 중독인가, 사랑인가, 아니면 또 다른 뭔가?

농담 삼아 "배운 도둑질이 이것밖에 없어서"라고 말하는데 이제 그냥 생활의 일부가 된 것 같다. 젊은 친구들한테는 미안한 얘기이지만 이젠 영화에 대한 열정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부담스럽다. 직업이라고 말하면 직업이고 자아 실현이라고 말하면 자아 실현이다. 작가로 참여한 영화가 성공하면 숨어 느끼는 성취감이 상당히 크다. <알포인트> 감독으로서 느낀 첫 번째 성취감과 별반 다르지는 않다. 난 뒤에서 느끼는 성취감이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래도 작가가 감독 데뷔해서 성공하는 경우가 드문데 후배들이 기뻐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작가는 계속 작가로 남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시장이 작다 보니까 작가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다. 계속 작가만 하려는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다.

한번 감독하면 계속 감독님인데 앞으로는 감독이라는 명함을 달고 활동할 건가?

연출이야 계속하겠지만 내가 썼던 시나리오들 중에서도 나에게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면 미련 없이 넘길 것 같다. 겸업이라고 하면 선언적인 얘기 같은데 시나리오는 계속 써나갈 거고 완성되면 내가 할지, 다른 사람에게 넘길지 고민할 것 같다. 어쨌거나 테크니션은 안 될 것 같고, 이야기꾼으로서의 연출을 해나갈 것 같다.

다음 행보에 대한 그림은 그려지나?

전혀 없다. 캄보디아에 가서 좀 쉬었다 오고 싶다.

그 쪽으로는 소변도 안 보겠다더니!

정말 지긋지긋했는데 한 달 전부터 그리워졌다.(웃음) 캄보디아에 그렇게 오래 머물면서도 앙코르와트도 한번 못 다녀왔다. 휴가차 한번 다녀올 생각이다. 사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현지 스탭들 중에 너무 잘해준 사람이 있다. 나와 동갑인데 캄보디아 떠나면서 제대로 인사도 못했다. 술 한잔 마시면서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해야지. 이번에는 꼭.

사진 맹수영 기자

프로필 1961년 생 | 한양대 국문학과 졸업, 장산곶매 회원 |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하얀전쟁> <비상구가 없다><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텔미썸딩> <링> 등 각본 | <알포인트> 감독


한승희, 주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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