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2-19 21:56:23 IP ADRESS: *.147.6.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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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에서 올 로케이션 된 멜로 프로젝트 <데이지>를 끝낸 정우성은 한순간의 포즈도 없이 <중천>을 위해 중국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곧 아름다운 사유가 빼곡한 편지 한 통을 <보그>에 보내왔다. 꿈과 위트가 넘치는 사색가의 문장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토씨 하나 변용하지 않았다.

[img1]

<중천> 촬영은 고생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킬러와 형사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담을 영화 <데이지>가 개봉을 앞둔 지금, 당신은 중국에 계시는군요. 이렇게 멀리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니 마치 내가 머나먼 전쟁터에 떠나 보낸 애인에게 ‘잘 지내느냐’고 안부를 묻는 것처럼 애틋한 기분이 드네요. 당신도 애인에게 건강하게 잘 있다고, 속삭이는 음성으로 친절하고 자상한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할 수 있죠? 편지로 이뤄지는 만남은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습니다. 혹여 제가 보내는 편지 중 어떤 부분이 당신을 당혹스럽게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당신은 혼자서 골똘히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어쩌겠어요? 당신은 중천에, 나는 서울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편지의 행간에 담긴 ‘어떤’ 오해는 진실을 향해 가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자, 신뢰감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세요.

2006년 1월 3일 저녁 6시 12분. 하루 일과를 마친 후 두산타워 16층 <보그> 사무실에서.

[VOGUE] 어떻게 지내십니까? 중천의 하늘과 서울의 하늘, 암스테르담의 하늘은 모두 같은 빛깔인가요? ^^ 중천의 하늘은 흐린 날이 많군요. 이곳에 오기 전 서울의 가을 하늘은 유난히 맑고 높은 하늘이었던 것 같고, 암스테르담의 하늘은 낮고 구름이 많고 그 시기에 사계절의 하늘을 다 담고 있는 듯 빠른 변화…, 늘 ‘아름답다’라는 탄성이 나오는 하늘이었죠. 그곳 하늘을 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친구가 없는 하늘 밑은 쓸쓸하겠죠.
<무사> 시절에 이미 겪었겠지만, 중국에서의 생활, 판타지 블록버스터라는 환경 모두 한 배우가 견뎌내기란 쉽지 않을 텐데요.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 떠오릅니다. 무엇이 당신을 다시 그곳으로 가게 했습니까?

[정우성] 글쎄요. <무사>를 하면서도, 또 지나고 나서도 힘들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캐릭터의 몰입은 환경을 이겨내는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고생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다만 감기에 걸려 촬영에 지장을 느낄 뿐이죠. <지옥에서 보낸 한철>…^^ 카메라 앞이라면 지옥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가 나를 이곳에 오게 했고, 배우라는 직업이 나를 이겨내게 합니다.

[VOGUE] 당신이 서울을 비운 사이에 당신의 친구들, 곽경택·장동건·이정재의 영화 <태풍>이 개봉됐습니다. 영화의 비평적인 면은 일단 뒤로 하고 사람들은 그 큰 영화를 본 뒤 자동적으로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아, 장동건과 이정재가 대한민국 양극단의 남성성을 연기하는 동안 우리의 정우성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정우성] 정말요… 뭘 하고 있었나… 한참을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군요. 암스테르담이란 낯선 곳에 나를 던져놓고 내가 좋다고 시작한 영화 <데이지>를 했어요. 세상이 바라보는 나와는 상관없이 <데이지>의 킬러 ‘빅의’를 내가 추구하는 캐릭터로 만들려고 노력했죠. 지금은 중국에서 <중천>의 ‘이곽’으로 살고 있어요. 좀더 발전된 내 기량으로 내가 추구하는 캐릭터의 완성본을 만들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모든 영화는 한편 한편이 나를 성장시키는 과정이고 나는 캐릭터를 성장시킵니다. 세월이 인간을 성장시키듯… 친구들이 세상 이목의 중심에 있는 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그것이 또 나를 분발시키는 자극제이기도 합니다. <데이지>와 <중천>이 개봉한 후에도 “넌 정말 뭘 했어?”라는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 한편에서 모든 걸 얻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또 그럴 수도 없고요. 앞으로의 많은 영화에서 얻을 것이 아직 더 많기 때문이에요.

[VOGUE] 당신에겐 남자 냄새가 나기도 하고 나지 않기도 합니다. 한국 남자 냄새를 물씬 풍기는 장동건과 이정재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죠. 그들은 <젊은 남자> <친구> <태극기…> <태풍> 등으로 가부장 사회의 남자로서 통과제의를 거쳤죠.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비트>나 <태양은 없다>에서처럼 당신에겐 남자의 땀냄새보다 어떤 초현실적인 청춘의 냄새, 이상주의자의 냄새가 납니다. 당신은 언제 자신에게 남자의 냄새를 맡습니까?

[정우성] 매력 있는 여자를 보며 호르몬이 증가하는 것을 느낄 때죠. 이상은 나에겐 낭만입니다. 이상은 현실을 이겨 넘고자 하는 기백입니다. 이상은 혁명을 낳기도 하고 이상은 가치관이며 이상은 철학이기도 할 것입니다. 세상의 시름에 맞게 행동하는 이상주의자는 영웅이 되기도 합니다. 이상은 늦은 시간 친구와 술잔을 부딪칠 때 좋은 안주가 되기도 합니다. 이상이 없는 남자… 남자는 고민할 때 멋지지 않을까요.? 요즘은 그런 이상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는 건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은 망상입니다. 현실을 두루 볼 줄 알아야 이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세상을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하고요. 저는 아직도 남자가 되어가는 길인 것 같습니다.^^

[VOGUE] 유위강 감독과의 작업은 즐거웠나요? <무간도>에서 맡을 수 있는 유위강의 어두운 냄새와 곽재용의 낙천적인 냄새가 어떻게 조화를 이뤘을까 궁금하더군요. 게다가 킬러라니요? 당신에게서 지옥에 갇힌 소년 같은 무드를 주는 레옹을 발견하게 되는 건가 싶어 좀 웃기기도 하고 낯이 간지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정우성]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는 프로고 현장을 즐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 촬영에 달인이고요. 오히려 곽재용 감독님보다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에 어린 아이 같은 모습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너무 어두운 <데이지>의 원고를 희석시키는 작업부터 시작했고 그것을 영화로 옮겼습니다. ‘레옹’… 낯 간지러움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VOGUE] 곧 감독이 된다지요? 배우 출신의 장편 영화 감독은 방은진 이후에 처음 보는데, 저도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리고 우리끼리 이야기인데요, 당신의 그 러브 스토리에 누구를 캐스팅하고 싶습니까?

[정우성] 글쎄요… 우리끼리 얘기만은 아닌 것 같은데…^^ 저도 감개무량합니다. 어떤 영화가 나올 지… 참, 사실 누구를 캐스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미지를 상상할 때 그 안에 내 모습이 있어 그 모습으로 이미지나 이야기를 연장시키게 됩니다. 어찌 보면 큰일이죠.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VOGUE] 사막을 좋아합니까? 늪을 좋아합니까?

[정우성] 황량한 사막… 길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 서서 몽롱한 시선으로 하염없이 사막의 끝을 보는 눈빛도 좋아하고, 무서운 힘으로 끌어 당기는 늪에서 눈 앞에 보이는 땅 위에 올라서겠다는 억척스런 불굴의 눈빛도 좋아합니다. 내가 존재해야 할 곳이라면 어디가 좋고 어디가 싫겠습니까. 그곳이 있고 내가 그곳에 있는데… 사막은 모험가의 인내심 같고 늪은 개척자의 용맹함 같기에 둘 다 좋습니다.

[VOGUE] 당신은 너무 잘 빠졌습니다. 너무 잘 빠진 사람이 너무 잘 빠진 세계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대체 어떤 콤플렉스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세간의 이목과 나를 모르는 제3자의 선입견적 시선이 콤플렉스고 또 콤플렉스를 만듭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브래드 피트는 안젤리나 졸리와 글래머러스한 스캔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능한 홍보 담당자는 그 일을 아주 매력적으로 릴리스 했죠. 당신도 그런 세기의 로맨스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까?

[정우성] 사랑… 사랑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군요.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포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공인이기에 내 사랑을 잘 알릴 필요도 있겠군요. 하지만 누군가 진실한 사랑을 한다면 당연 상대도 느낄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세상도 사랑스럽게 바라보겠죠. 사랑… ^^ 질문의 의도를 짐작하고 돌려 말하려니 재미있네요. 사랑… 지난 몇 년간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단어네요.

[VOGUE] 당신이 듣기에 당신의 목소리는 아름다운가요? 나는 당신의 목소리가 다이얼로그보다는 모놀로그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정우성] 그건 어릴 적부터 독백을 즐겼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아직도 즐기고 있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열린 입이라고 아무 소리나 생각없이 내뱉으려 하지 않습니다. 진실된 소리를 내려고 노력합니다. 나의 모놀로그가 진실된 다이얼로그가 되도록. 배우로서 모놀로그가 어울리는 몇 안 되는 배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VOGUE] 누아르 조명을 좋아합니까? 눈부신 자연광을 좋아합니까?

[정우성] 조명은 분위기에 따라 자연광을 흉내낸 것이죠. 자연광을 좋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해바라기죠. 한낮에 눈을 감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있는 해바라기는 정말 좋죠. 케이크보다 달콤하고 커피보다 향긋하죠.

[VOGUE] 분명 당신에겐 배우로서 당신이 깨야 할 정형성이 있습니다. 당신은 모두를 다르게 연기하지만, 그래도 정우성스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존중하고 있고, 그래서 자신을 진흙 바닥 위에 완전히 내동댕이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로서 당신의 가장 큰 장애는 바로 정우성이라는 아름다운 자아 그 자체가 아닌가 합니다.

[정우성] 사회의 정형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아가 발달했고, 그 자아는 진흙 바닥에서 더 자신을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또 ‘나’라는 정형성이 만들어지고… 맞습니다. 내가 넘어야 할 장애는 나라는 거…. 하지만 ‘나’라는 정형성에 갇혀 살진 않습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을 보며 느낀 것은 늘 자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꿈도 없고 서로에 대한 존중도 없고, 자신에 대한 존중도 없고, 따라 가기 바쁜 교육과 제도 속에 그저 무관심. 어린 나이에 사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저는 부자 때문에 가난해지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제가 원망스러웠던 건 “뭔 짓을 하건 돈만 많으면 돼! 돈만 벌면 돼!” 이렇게 미성숙하고 넌센스적인 사고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사회였습니다. 무언가 꿈을 가질 수 있고, 또 그 꿈을 위해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하면 꿈을 이루고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는 느낄 수 없었어요. 황량하다 못해 살벌한 분위기였죠. 그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에 나는 나의 캐릭터들에게 비관적 상황이지만 “이겨나갈 수 있어, 이룰 수 있어” 긍정적 사고와 정당성, 또는 존중의 가치관을 투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영화를 보고 영향을 받는, 그러니까 내가 겪은 성장기의 젊은이들이 좀더 희망적 사고를 지향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요. 혹은 나를 보며 꿈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것이 때로는 반어법이 됐든 직설법이 됐든 언제나 그런 생각을 갖고 캐릭터를 대하기 때문에 지수 씨가 말하는 정우성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모든 성장기의 아이들이 빨리 자아를 형성하고 바람직한 가치관을 가진 어른이 되길 바라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시기는 정말 소중하고 아름답고 존중받아야 할 시기예요. 사회는 그들에게 꿈을 가질 기회를 줘야 합니다. 또 성공을 하든 못하든 모든 순간의 삶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VOGUE] 어떤 여자를 혐오합니까?

[정우성] 글쎄요. 아직 그런 여자를 만나보지 못해서. 그런 여자도 있나요?^^ 남자를 돈으로만 보는 여자가 있다면 혐오스러울 수도 있겠네요.

[img2]

[VOGUE]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고 계신가요?

[정우성] 전 흥얼거리는 것을 좋아해서 별의별 노래를 다 흥얼대죠. 특히 샤워할 때나 분장할 때, 어떨 땐 즉흥적으로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음을 흥얼대기도 하고…, 80~90년대 노래나 그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일본 노래 뭐, 그런 발라드를 많이 흥얼대죠. 또는 영화 음악도요.


[VOGUE] 제 얘기를 좀 할게요. 저의 바로 이전 화두는 ‘예술가와 장인 사이’였답니다. 그리고 지금 화두는 ‘세상에서 정당한 것은 없다. 차라리 누가 혹은 무엇이 덜 부당한가를 판단하는 게 덜 혼란스럽다’입니다. 생각의 달인인 당신에게 이 두 가지 화두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군요. 우리는 늘 부당한 것을 빗대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늘 부당한 것과 비교해 자신을 위로합니다. 우리는 늘 부당한 것에 자신의 한계를 둡니다. 반대로 우리는 정당한 것에 자신의 한계를 느낍니다. 정당한 것 앞에 자신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당한 것 앞에 자신을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당한 것을 들춰내 한바탕 굿이라도 하듯 큰 소리로 서로가 목소리 높여 부당함을 욕합니다. 그 끝에 정당함을 찾죠! 정당함을 대할 때 우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박수를 치다 어느 순간 부당함에 돌아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우리는 정당함을 찬송하기 보다는 부당함을 말하는데 더 익숙합니다. 하지만 그 부당함을 끝까지 따지는 데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또한 정당함의 사례가 잊혀지는 만큼 빨리 부당함의 사례도 잊어버리죠. 우리는 정당함과 부당함을 말하기 전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먼저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술가는 감성에서 나오고 장인은 인내력에서 나옵니다. 예술가는 소질에 기인하지만 장인은 노력에 기인합니다. 예술가는 세상의 소리 위에 있지만 장인은 세상 안 삶 속에 있습니다. 예술가는 세상의 소리에 반응하지만 장인은 묵묵합니다. 예술가의 손은 가늘고 아름다울 것 같고, 장인의 손은 굳은살에 투박할 것 같습니다. 예술가는 세상사와는 상관없는 혹은 상관 있는 한 면만을 바라보는 얼굴이 골똘할 것 같고, 장인은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견뎌내 자글자글 주름에 싸인 미소에 삶의 전희도 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드라마틱한 순간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독백합니다. 반면 안톤 체홉의 여주인공 니나는 “살면서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라고 독백하죠. 당신은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뭐라고 독백합니까?

[정우성]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니나의 독백엔 의지가 담겨 있어 조금은 낫지만요. 자, 이제부터 ^^ 독백^^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지. 삶에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느냐가 운명과는 상관없이 내가 선택한 삶의 질을 결정지을 것이다.” 뭐 이런 그냥의 생각들, 하지만 내 가치관에 기반한 생각들을 독백하죠.^^ “생각이 없는 시간은 죽어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죽어 있는 시간도 가치는 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은 가치가 있다. 그순간이 모든 이가 나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붓는 순간이어도….” ^^ 뭐 이런 식으로 독백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도 하고요…(나중에 그는 전화로 이 말을 덧붙여달라고 했다).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존재한다.” “1분 1초 어느 한순간의 가치로도 영원할 수 있다.”

[VOGUE] 당신은 독심술을 합니까? 통찰력이 깊은 사람들은 종종 그런 능력이 있죠.

[정우성] 한참을 웃게 하는 질문이군요. 저는 축지법도 합니다. ^^ 변신술도 하고요. 통찰력 있게 봐주시는 질문에 감사합니다. 글쎄요. 누구를 깊게 대할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 거란 판단은 금방 내려지는 편입니다. 그것은 그를 또는 그의 상황을 어떤 선입견 없이 대하려는, 그래서 그 자체를 보려는 느낌에서 오는 판단일 수도 있고, 또는 상대가 내가 대하는 것에 반응하는 언행을 보고 듣는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눈치가 빠른 정도. 독심술은… 배우고 싶군요.^^

[VOGUE] 인터뷰를 하면서 아쉬운 것, 기자들이 꼭 물어봐야 하는데 안 물어보는 것들이 있나요?

[정우성] 질의 응답식 보다는 이런 대화식 인터뷰를 좋아하죠. 이런 인터뷰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답하는 재미도 있고 물어봐줬음 하는 질문도 잊어버려요.^^

[VOGUE] 팬시하다,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우성] Fancy…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익숙해야 할 단어고, 또 그런 재주가 많고 실력이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저는 현실적인 것을 비현실적으로, 혹은 영화적으로 푸는 것에 더 관심이 가고 그런 상상을 더 많이 합니다.

[VOGUE]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돈을 벌었나요?.

[정우성] ^^네. 돈만을 쫓아가면 비굴해집니다. 그러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VOGUE] 현재 당신 생활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무엇이죠?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세요. 섹스? 여자? 지식? 휴식? 친한 친구의 비판? 그게 무엇이든 간에.

[정우성] 대한민국 성인 대다수가 느끼는 부족함.^^ 저도 똑같이 느낍니다!!

[VOGUE] 설경구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만 보고, 백윤식은 영화의 지도인 시나리오를 보고 배역을 결정합니다. 당신은 배역의 ‘인간미’를 보고 결정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인간미란 대체 어떤 겁니까?

[정우성] 저 역시도 만드는 사람과 시나리오를 눈여겨봅니다. 배역의 인간미는 제도적 법리하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으나 도덕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을 존중하는, 악에 대응하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그 행동이 영웅적이진 못해도 그런 심성이 깔려 있는 인물을 좋아합니다. 물론 <데이지>의 ‘박의’는 킬러입니다. 그의 표적은 악인입니다. 도덕적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인. 그래도 그는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저는 악이 영화에서 미화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VOGUE] 당신이 <비트>에서 두 팔을 벌린 채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은, 젊은이들의 불안, 분노, 자유로움과 반항을 표현한 명장면으로 한국 영화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 인생의 명장면은 무엇입니까?

[정우성] 예, 맞습니다. 행운이죠. 배우로서 평생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명장면을 너무 일찍 얻었기에 또 그런 장면을 재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문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노력해야 하고요. 첫 영화 <구미호>가 개봉했을 때 스크린 중앙 계단 맨 뒤에 앉아 스크린 속의 나를 보고 또 보는 모습이 지금까지 제 인생의 명장면이겠네요. 스크린 속의 내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얼마나 창피하고 한심스럽던지.

[VOGUE] "<비트>는 정우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팔을 펼치는 이미지에서 시작됐다 할 수 있다. <태양은 없다>는 정우성의 얼굴이 못 알아보게 얻어터져서 화면에 꽝 떨어지는 이미지가 시작이었다.” 시나리오 작가 심산의 말입니다. 당신은 스타일이 텍스트를 대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우입니다. 자, 스타일이란 무엇인가요?

[정우성] 스타일은 색깔일 겁니다. 색깔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과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서 나오는 분위기일 것입니다. 분위기를 느끼는 것 그것은 잘 생기고 안 생기고와 예쁘고 안 예쁘고의 단순 시각적 반응이 아닐 것입니다. 스타일은 그 사람이 어떤 옷과 머리 모양으로 꾸미느냐가 아니라 어떤 가치관과 행동으로 움직이고 말하느냐입니다.

[VOGUE] 어떤 남자가 되고 싶습니까? 어떤 감독이 되고 싶습니까?

[정우성] 소주부터 최고급 와인까지 즐길 줄 아는 남자,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는 감독.

[VOGUE] 네덜란드 얘길 해주세요.

[정우성] 곳은 환한 길거리에서 튤립과 마리화나를 함께 살 수 있는 곳이죠. 네덜란드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죠. 그들의 여유로움에 부러웠어요. 타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힘에서도 ‘우리는 작을 수밖에 없구나’하는 괜한 자격지심까지 느꼈죠. 작지만 크게 사는 나라였어요. 그들의 생활 터전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옛 건물들은 우리가 옛 것을 보존하고 지키는 자세를 돌아보게 했죠. 암스테르담의 마리화나 카페와 홍등가는 관광객의 호기심거리일 뿐이었던 거예요.

[VOGUE] 밤에 꿈을 꿉니까? 어떤 꿈을 꾸나요?

[정우성] 요즘 꿈을 못 꾼 것 같습니다. 꿈꾸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꿈을 꾸려 잠자리에 들 때도 있지요. 꿈은 뭐 남들과 똑같이 개꿈, 물꿈, X꿈, 용꿈은 아직…^^ 전쟁꿈과 물꿈을 많이 꾸는 편이네요.


서문의 솔직한 편지에 감사 드립니다. 늘 얼굴을 뵙고 대화를 나누다 장문의 편지로 하려니 저 역시 친구에게 받은 편지에 답장하는 마음이 들어 특별합니다. 또 질문도 여러 가지가 있어 촬영에 묶여 있던 저에게 새삼 즐거운 활력이 되기도 합니다. 늘 깊은 관찰의 시선으로 대해주심에 감사하고, 질문의 의도와 맞는 대답이 되었길 바라고, 성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면 이해를 부탁합니다. 저의 마지막 조언은 Happy New Year!!!!!

2006년 1월 8일 아침 9시 26분. 밤샘 촬영 후 헝디엔 그랜드 호텔 110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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