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5-03 04:32:15 IP ADRESS: *.147.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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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9 08:00

청춘물 <바이 준> <후아유>를 연출한 최호 감독은 초롱초롱한 눈빛과 동글동글한 얼굴로 인해 매우 선한 인상이다. 그가 일명 ‘뽕 누아르’ <사생결단>을 차기작으로 결정했을 때, 아마 주위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을 것이다. <사생결단> 시나리오를 위해 부산으로 달려간 최호 감독의 취재기는 흡사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의 수사일지를 떠올리게 한다. <사생결단>이 이뤄낸 이야기의 핵심을 만들어준 누군가를 만나는 데까지는 오랜 인내가 필요했다. 친척들이 소개해준 술집 주인, 중간 보스, 경찰관이라는 정거장을 지나는 6개월 동안 최 감독은 눈을 부라리기도 하고, 어수룩한 척 머리를 긁적이며 안간힘을 썼다. 그것은 수면 밑에 잠든 대어를 낚기 위해 낚싯대를 드리운 채 꿈쩍도 않는 강태공의 기다림이었다. 후카사쿠 긴지의 남성드라마에 열광했던 최호 감독이 드디어 낚아올린 마약과 어둠의 세계, <사생결단>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쓰여졌다.

2003년 5월_ “그래, 결심했어! 뽕 누아르를 하는 거야”

<후아유>를 끝내고 청춘이란 화두가 지리멸렬해졌을 때 어영부영 1년이 후딱 가버렸고, 그동안 내면에서 장르에 대한 굶주림이 마구 솟아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즐겨봐왔던 장르영화들… 그런 작업이 하고 싶어졌고, 그래야 상업영화판의 늪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녘에 나이트 화장실에 가모 쓰고 버린 주사기가 바글바글…. ’
‘한창때는 유흥가에 판매자가 널맀고 택시 기사들도 판매… 한 짝대기 3만원!’
‘한번 찔르믄 부모형제도 빠이빠이, 영원한 노예가 되뿌는….’

부산 출신의 친지들이 술자리에 안주 삼아 늘어놓던 부산 마약계에 대한 가십들…. 그저 농담으로 흘려들었던 ‘뽕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 게 그 즈음이다.
친지들이 풀어놓은 그 징글징글한 에피소드들이 단 50%라도 실제에 근거한다면, 꽤 괜찮은 장르영화… 누아르가 나올 것 같았다.

“누아르는 장르가 아니라 세계관이다.”
어디선가 읽은 문구가 머리를 맴돌며,
뭔가 지독해 보이는 그 판에 현미경을 들이대면,
냉혹한 현실을 통쾌하게 비추어낼 세계가 나오리라, 는 통밥을 굴리며.

2003년 6∼7월_ “이러다 카드빚만 남는 거 아냐?”

표지에 NOIR라고 써놓은 빈 공책을 들고 부산으로 향했다.
허름한 부산역(지금은 화려한 KTX 역사로 바뀐) 앞 광장에 우뚝 서서
귓가를 자극하는 사투리에 파묻혀 인파를 바라보고 서 있자니 밀려오는 막막함이 참….
눌러라 눌러, 이따위 비전투적 근심은… 이제 막 전장에 나서는 놈이…. 주문을 외우고 택시를 잡아탔다.
일단, 부산 토박이 사돈들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연줄연줄 소개로 현직 중간 보스급 건달, 룸살롱 사장, 도박하우스 사장 등을 만났는데 ‘뽕 세계’의 실체가 가물가물… 잡히질 않는다.

룸살롱 사장: “친구가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1천억원대의 마약 밀수를 했다 걸려 들어갔고 그가 곧 출소할 예정이다. 아니, 내년이던가?” 하우스 사장: “내가 잘 아는 놈 소개해줄게. 잠시만… (전화 통화)… 잠수탔다는데….”
중간 보스: “약쟁이들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 그것들은 인간 말종, 쓰레기다. 내 친구 셋이 약 때문에 죽었는데 난 희귀종이라 불린다. 어려운 시기에도 그걸 안 했으니.”

도움이 될 듯 말 듯한 얘기를 듣다가 술자리가 이어지면, 어쨌든 자리를 청한 게 내쪽이니, 술값 계산하고 허탈감에 빠져 서울행 새마을호에서 영수증 챙겨보면 소득없는 지출이 심각했다.
한번은 <후아유>를 계기로 안면을 튼 시사주간지의 기자가 소개해준 부산의 한 경찰을 만났다.
속칭 ‘러시아 텍사스’라는 외국인 거리가 관할구역인 그에게 러시아 마피아들이 마약을 밀수하는지에 대해 여러 번 캐물었지만 직업 의식이 투철한 스타일이어서 아무리 술을 마셔도 속시원한 얘기를 하질 않았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뜬금없이 외국인 거리에 거주하는 파키스탄인 한명을 소개해주더니 툴툴 자리를 털고 가버린다. 나처럼 이름이 외자였던 파키스탄 친구와 술을 마셔가며 건져낸 얘기는 그 거리에서 몇 백달러면 총기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것. 뽕에 대해선 들은 바도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신문에서 떠들던 러시아 마피아의 국내 진출 어쩌고저쩌고하는 얘기는 검찰의 대언론 플레이로 뻥튀겨진 것이라는 것 정도. 이런 식의 허탕이 두달. 죽도 밥도 안 되고 카드빚만 남는 거 아냐? 하는 비전투적 심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안 돼… 세상은 전쟁터야… 정신차려. 전략 수정이 필요해.

(소근소근)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 시기의 몇 가지 인상이 <사생결단> 시나리오의 중요한 키가 됐다. 자신이 희귀종이라는 중간 보스의 얘기는 류승범의 캐릭터에, 파키스탄인과 경찰 술자리에서의 모습은 전형적인 야당과 경찰의 만남, 그 자체였다. 황정민과 류승범이 술집에 앉아 얘기하는 톤이 아마도 여기서 온 게 아닐까. 결국 그들은 나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2003년 8∼9월_ “무조건 형사들한테 매달리고 보자”

일단은 무작정 부산에 덤벼드는 것을 포기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부산일보>의 지난 기사 검색 중에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발견했다. 이 사건에는 뭔가… 동물적인 이끌림이 있었다.
일명 남구 백운포 살인사건. 1999년 마약 조직의 내부 암투에 의해 일어난 살인사건이었고, 당시에 기사를 썼던 기자와 어렵게 통화가 이루어졌다. <부산일보> 기획취재부의 강병균, 이현우 기자였다.
그중 나와 연배가 비슷한 이현우 기자가 무척 열심히 도와주었는데, 그는 학생 시절 내가 장산곶매 활동할 때 조감독으로 참여한 <닫힌 교문을 열며>를 본 적이 있었기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운이 따르기 시작했다.
이 기자가 소개해준 살인사건의 담당 형사들을 만났는데, 남부서의 형사들 중 한명이 부산 지방경찰청 마약과에 착출돼 오랫동안 일한 마약 담당 베테랑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제부터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끈질기게 먹이를 물고 늘어지기.

이 즈음에서 취재의 유의사항 몇개를 얘기하면,
-넉살 좋게, 안면 두껍게, 노골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다(이게 가장 힘든 요소였다. 성격상).
-절대로 긴장을 늦추지 말고 말 한마디, 한 단어라도 기억해야 한다(술에 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마시는 게 무척 힘들다. 순간 무너지면 다음날 일어나선 자신이 취재당한 걸 느낄 것이다. 돈까지 내고).
-아닌 것 같으면 과감하게 일어나고 뭔가 나올 것 같으면 끈질기게 늘어진다.
-세 보여야 한다(얼굴이 동안인 편인 나는 그걸 극복하려고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마약과의 베테랑 형사를 두달 동안 수차례 만나 얻은 핵심은 다음과 같다.
-마약계의 최고 상선은 일선 형사 따위가 건드릴 수 없다는 것.
-부산의 마약과 형사들 중 비리에 연류돼 옷 벗은 사람이 꽤 된다는 점.
-마약 수사는 그만큼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선 사이에 있다는 점(마약 수사는 교도소 담을 타고 다니는 것이라고 표현된다).(그 형사의 사수- 부산 마약 수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역시 구속된 뒤 옷 벗은 인물인데 취재를 기피해서 결국은 만나지 못했다.)

슬슬 원하던 것… 이 세계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취재는 시동이 걸렸고 수많은 형사들의 디테일이 노트에 기록됐다. 그러나 아쉬운 건 정작 ‘뽕 세계’의 핵심! 제조와 판매 그리고 투약, 중독 등의 디테일은 형사들도 관찰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취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여기서 머물면 반쪽짜리 이야기… 결국 써먹을 수 없는 무용지물이었고, 이 능선을 넘어가면 그야말로 오아시스가 펼쳐질 것이었다.

2003년 9월_ “오, 뽕계의 대부님, 나의 대부님”

9월 초경, 무작정 다시 부산에 내려왔다.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사건이 터졌다고 도무지 만나주질 않는다. 모텔에 진을 치고 3일을 기다렸지만 짬이 나면 주겠다는 전화가 오지 않는다. 4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전화를 거니 받지 않는다.
첫 만남에서 같이 만났던 동료 형사에게 전화를 하니 기다려보라고 한다. 만나줄 때까지 서울 안 가고 버티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취재에 미진한 점을 정리해서 내려왔기에 꼭 소득이 있어야겠다는 오기가 들었다. 한편으론 전에 쏜 술값이 얼마인데 하는 본전 생각이 났다.
할 일이 없어 <부산일보>의 이 기자에게 부탁해서 부산 달동네의 이 구석 저 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부산 달동네의 특징은? 바다가 보인다는 것이다!
정겨운 느낌이 들고 그야말로 지역적 특성이었다.
5일째 되던 날 오전, 드디어 전화가 왔다.
오후 1시에 부산역 광장 옆 아리랑호텔에 가보라는 것이다. 이날은 포기한 채 오후 5시에 출발하는 서울발 새마을호를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형사 왈, 부산 마약계의 산증인이 나와 있을 것이라고 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달 동안 그토록 기피하고 연결해주지 않던 인물을 이제야 노출시키는 것이다.
아리랑호텔에 앉았는데 30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질 않는다.
형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라꼬요? 거기 있다꼬 방금 통화했는데?”
뒤돌아보니 가장 으슥한 자리에 앉아 있던 자그마한 체구의 50대 남자가 눈인사를 한다. 30분 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첫 만남에 경계를 하고 뭔가 의심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먼저 어수룩하게 허점을 보이는 편이 취재원을 편하게 한다. 영화 두편 해서 말아먹은 이런이런 감독이고 취재 목적은 이런 것이다. 솔직히 설명을 하자 그제야 씩 웃어 이빨을 드러내며 충혈된 눈을 반짝인다. 드디어 오아시스를 찾은 것이다!

2003년 10월∼2004년 9월_ “이 원석을 어떻게 가공할 것인가?”

<사생결단>의 자막을 유심히 보면 기술고문이라는 항목이 있다.
이 항목에 해당하는 이름이 바로 그날 내가 아리랑호텔에서 만난 인물이다. 그때의 만남을 인연으로 십여 차례의 긴 인터뷰에 응했고, 영화의 스탭으로 참여까지 했다.
영화에 나오는 제조, 포장, 판매 신들의 모든 디테일한 리얼리티는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과거에 군수사관 출신이라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는, 수사관 경력 탓인지 조리있고, 논리적이고, 앞뒤 아귀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화법을 구사했다.
(전두환이 들어서면서 사수 목이 날아가 졸지에 옷 벗었고, 그 뒤 마약에 손을 댔다. 그래도 군인에서 갑자기 마약 제조라. 이해가 잘 가지 않았으나 이 의문은 그와 안 지 1년이 지난 뒤에야 풀렸다. 술자리에서 그가 털어놓았다. 자기 아버지가 부산 마약계의 유명한 제조책이었다고.)
경상도의 하이톤을 내내 유지하며 그가 뭔가를 설명하면 영화처럼 흥미진진한 신들이 눈앞에 흐르는 것 같다. 특히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리고선 구미에 맞게 적당히 부풀려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그의 엔터테인먼트 기질엔 항상 감탄을 했다.

인터뷰들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함의 연속이었고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부산 마약시장의 변천사
-부산 마약계의 전설로 남은 거두들에 대한 에피소드
-중간 판매책의 하루 일과
-최고 상선과 검찰간의 공조 관계
-형사와 마약상간의 공조체제=악어와 악어새
-제조 과정의 완벽한 구술 재현
-90년대 들어 신종으로 개발된 제조 기법=이동식 제조 공장
-지독한 중독 증상
-마약과 섹스
등등.

마약의 무서운 실체를 알아가면서 애초 취재의 주안점,
‘누아르는 세계관이며 이 세계의 냉혹하고 지독한 시스템을 잘 묘사하는 것’,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명필름의 양해를 구해 계약돼 있던 다른 작품을 미루고, 이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드러난 세계… 이 원석을 좋은 모양으로 가공해내야 되는 것이다.
“실제 경험에 토대를 두어야 하지만, 그것이 실제 사건들보다 더 진실해질 때까지 상상력으로 그것을 변형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헤밍웨이의 미학적 원칙을 떠올리며 윤덕원 작가와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글 최호/일러스트레이션 이진아

[씨네21] 2006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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