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5-12-21 10:00:03 IP ADRESS: *.16.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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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제가 등반대장으로서 참여했던 <2005한국초모랑마휴먼원정대>는 여러 모로 잊을 수 없는 등반이었습니다. 올해로 제가 히말라야에 발을 들여놓은 지 20년이 됩니다. 그 동안 제가 이끌었던 원정만도 30회를 훌쩍 넘어섭니다. 하지만 그 어떤 원정도 이번의 휴먼원정대만큼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저와 원정대원들은 꼬박 90일 동안 이 원정에 매달렸습니다. 선발대원들의 일정까지 포함하면 거의 100일에 육박합니다. 그 이전의 훈련기간까지 포함한다면 그 날짜조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만큼 힘겨운 원정이었습니다. 단순히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한 원정이었다면 그렇게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과 그 밑에 묻혀있는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합니다. 단 1분만이라도 발을 디디면 정상에 오른 것으로 인정됩니다. 하지만 시신을 수습하여 아래로 운구하는 일에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전혀 새로운 등반방식과 장비들이 요구됩니다. 세계등반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기에 준비과정에서부터 무진 애를 써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한 준비와 훈련을 마쳤어도 실제의 수습과정에서는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문제들과 마주쳐야만 했습니다.

이번 등반과정 내내 저는 죽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의 상처를 곁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저 자신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더는 오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죽음은 제 코 앞에 들이닥쳐 있었고 제게는 돌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죽음과 삶 사이에 알지 못했던 통로가 열렸습니다. 저는 제가 그들을 수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저를 불러 수습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불가사의한 교감이 형성되어 그들이 저를 보살펴 주었던 것입니다. |

만약 박무택의 시신이 백준호와 장 민 등 다른 두 대원들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실종상태였다면 이 원정대를 꾸려 떠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시신이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신이나마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결성된 것이 바로 휴먼원정대입니다. 휴먼원정대를 결성한 것은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휴먼원정대가 우리들 자신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 것들을 새삼스럽게 되짚어보도록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지난 20년 간 히말라야를 등반하면서 저는 오직 정상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등반에서 저는 정상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곳에 이르는 길과 그 길에 묻혀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8천미터를 넘어서면 곳곳에 시신들이 즐비합니다. 예전에도 그들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오직 정상만을 바라보는 등반을 할 때, 저는 그들의 시신을 보며 공포와 연민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들의 시신을 넘어 앞으로 나아갔었습니다. 성취욕에 눈이 멀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잊었던 겁니다.

과연 히말라야의 정상에 선다는 것이 동료들의 시신을 외면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될 만큼 가치 있는 일일까요? 제가 이번 원정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그렇지 않다!”는 강한 부정의 확답을 뼛속 깊이 아로새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동안 오직 정상에 오르기 위하여 산에 올랐습니다. 제 눈은 항상 하늘 저 높은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휴먼원정대의 등반을 통하여 삶과 등반을 대하는 저의 태도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제 눈은 하늘로 오르는 그 길에 초점을 맞춥니다. 정상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과정이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들이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더 할 나위 없이 깊은 애정과 연민을 느낍니다.

정상에 오르려는 것은 히말라야 등반가만이 아닙니다. 회사원이건 자영업자건 예술가건 전업주부이건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에 오르는 일은 분명 전력투구를 요하는 일이고 칭송받아 마땅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오직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집중한 나머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될 것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면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이 무한경쟁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엔가 잊어버리게 된 소중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바로 인간애, 우정, 의리, 약속, 희생과 같이 너무도 오랫동안 들어본 적이 없어 생뚱맞은 느낌마저 주는 빛바랜 단어들입니다. 저는 이번 원정을 통하여 그것들을 조금이나마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 앉아 있었지만 지극정성을 다하여 닦고 또 닦아내니 여전히 그 찬연한 빛이 눈부셨습니다.

휴먼원정대는 그 물량과 인원에 있어서 근래에 보기 드물 만큼 대규모원정대였습니다. 저희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 도와주신 분들이 없었더라면 출범 자체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저희를 후원해주신 문화관광부, 파라다이스, 트렉스타, 파고다, 포스코, SK, 고어텍스, MBC, 중앙일보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대한산악연맹과 대한산악연맹대구광역시연맹 그리고 계명대학교 및 계명대학교산악회에도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고인경 원정단장 및 손칠규 원정대장 이하 원정대원 여러분들의 헌신적인 노고에 대해서는 뭐라고 감사의 뜻을 표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다(셀파들의 우두머리)인 파상 이하 고산등반 전문셀파들의 용맹스러운 등반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팀웍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등반이었습니다. 베이스캠프를 방문했던 격려단 여러분들의 애틋한 우정도 가슴 깊이 간직해 두겠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 나눈채 서둘러 다른 하늘 아래로 가버리신 한승권 회장님, 당신의 호탕한 웃음과 넉넉한 인품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원정기간 내내 대원들과 동일한 등반을 해내며 힘겨운 촬영을 계속했던 임채유 프로듀서 이하 MBC 다큐멘터리 팀, 고소증세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던 중앙일보의 김세준 기자와 오종택 사진기자, 원정 이후 멋진 사진전을 개최한 사진작가 김우영, 휴먼원정대의 전과정을 취재하여 이렇듯 책으로 엮어낸 산악작가 심산,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휴먼원정대의 활동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의 가슴에 작지만 따스한 위안이 되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5년 여름

한국초모랑마휴먼원정대 등반대장

엄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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