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02-03 00:03:06 IP ADRESS: *.20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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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마리아주 모르면 간첩이라고?
심산의 와인예찬(52) [007 위기일발](테렌스 영, 1963)의 테텡제와 콩트 드 샴페인

수족관 안에 세 마리의 물고기가 있다. 영리한 한 놈이 나머지 두 마리를 괴롭혀 화를 돋구어놓고는 자기만 슬쩍 빠진다. 어리석은 두 마리가 서로 물고 뜯다가 한 마리가 숨진다. 이때는 이미 승리한 물고기마저 지쳐버린 상태다. 영리한 물고기는 그제서야 “마치 스펙터처럼” 남겨진 한 마리를 공격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 1963)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스펙터 두목 블로펠트의 철학 혹은 계략이다. 모습을 드러낸다고는 하나 얼굴마저 보여주는 건 아니다. 털이 북실북실한 하얀 고양이를 쓰다듬는 우아한 손. 그것이 블로펠트의 트레이드 마크이고, 이후 숱한 영화들 속에서 반복 재생 혹은 패러디되고 있는 최초의 이미지였다.

여기서 ‘어리석은 두 마리의 물고기’란 물론 미국과 소련을 말한다. [위기일발]에서 스펙터가 구사한 계략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여기 소련의 암호해독기 ‘렉터’가 있다. 소련 정보국장 클렙(롯데 레냐)은 스펙터의 일원이다. 그녀는 소련군 여장교 타티아나 로마노프(다니엘라 비앙키)에게 렉터를 빼돌려 007에게 넘기면서 망명을 요청하라고 지령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타티아나와 007을 동시에 살해함으로써 미국과 소련을 전면전으로 치닫게 만든다. 이 임무를 수행할 스펙터 요원은 살인광 출신의 그랜트(로버트 쇼)다.

[위기일발]의 본드걸인 타티아나는 그러므로 매우 미묘한 존재다. 그녀 자신은 소련을 위해 일하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스펙터의 음모에 놀아나고 있는 꼴이다. 007을 유혹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역시 그녀의 임무인 동시에 본능이 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미스 로마 출신으로서 촬영 당시 21세였던 이탈리아의 여배우 다니엘라 비앙키는 이 미묘하고 매혹적인 역할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단 이탈리안 엑센트가 너무 강해서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구사하는 바람에 그녀의 대사들은 모두 후시 녹음으로 더빙해야만 했다.

[img2]

[위기일발]의 주요 로케이션은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이루어졌다. 1600년전 콘스탄틴 제국이 만들었다는 지하수로나 ‘소망의 기둥’으로 유명한 소피아성당 같은 관광명소들이 007의 활약장소로 선택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왕 터키까지 왔는데 집시들의 풍속을 빼놓을 리가 없다. 애간장을 태우며 혼을 쑥 빼어놓는 밸리댄스나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처녀들의 사투(!) 같은 것들도 흥미로운 눈요기거리로 제공된다.

집시촌 액션시퀀스에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술 하나. 바로 ‘터키의 국민주’라고 불리우는 라키(Raki)다. 알콜도수가 40도를 넘어서는 전통 증류주인데, 신선하고 독특한 향을 가지고 있으며, 물을 첨가하면 신기하게도 뿌옇게 변한다. 그래서 얻게 된 별명이 ‘사자의 우유(Lion's Milk)’다. 터키를 중심으로 하여 지중해 연안에 널리 퍼져있는 술이어서 이 지역을 여행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맛봤음직한 멋진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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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일발]에서 인상적인 와인신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007의 등장 장면인데 영화가 시작한지 무려 18분이나 지난 다음이다. 나원참 제 아무리 한량에 플레이보이라해도 그렇지 자기가 주인공인 영화에 이렇게 뒤늦게 얼굴을 들이밀다니 그의 신임 상관 M(버나드 리)이 화를 낼만도 하다. 007의 호출(!)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무언가 엄청난 일이 터지면 M은 머니페니를 들볶고, 머니페니는 007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다. 그럴 때 007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크게 두 가지의 일에 바쁘다. 샴페인과 여자.

[위기일발]에서는 더욱 가관이다. 장소는 강가에 정박에 있는 자그마한 보트 안. 보트의 안팎에는 피크닉 바구니, 칵테일 셰이커, 아이스 버킷, 와인잔, 그리고 샴페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007의 입술은 여자의 입술에 닿아있고, 007의 손은 여자의 가슴을 탐닉하고 있는데, 007의 발가락은 엉뚱하게도 웬 끈(!)에 감겨있다. 그 끈은 강 속으로 드리워져 있는데 키스를 하다말고 일어나 끈을 잡아당겨보니 따라올라 오는 것은 샴페인 떼뗑제(Taittinger)다. 샴페인병을 만져본 007이 한 마디한다. “아직 덜 차군.” [위기일발]에서 007이 내뱉는 첫 번째 대사다.

[img4][img5]

두 번째 와인신은 007이 문제의 암호해독기 ‘렉터’를 강탈한 다음 타티아나와 함께 올라탄 발칸반도 횡단열차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스탄불에서 올라탄 그 열차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와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를 통과하여 지중해 쪽으로 나아간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는 영화가 촬영되던 1962년 당시 독립국가가 아니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던 6개의 공화국에 속해 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여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었다는 뜻이다. 이 횡단열차 안에 스펙터의 킬러인 그랜트가 동승하게 되면서 영화의 긴장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열차의 식당칸에서 세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다. 007은 자신과 타티아나를 위해 구운 넙치 요리와 샴페인을 시킨다. 이 장면에서 서빙되고 있는 샴페인의 정확한 라벨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병과 라벨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테텡제의 스페셜 퀴베인 콩트 드 샴페인(Comtes de Champagne Brut Blanc de Blancs)이 아닌가 싶다. 이른바 ‘샴페인의 백작’이라 불리우는 최고급품이며, 오직 샤르도네만으로 만들어진 드라이한 제품이다. 그랜트는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레드와인을 시킨다.

침대칸으로 돌아온 두 남자는 적으로 돌변한다. 그랜트가 권총을 겨누자 007이 자탄하듯 내뱉는다. “생선요리에 레드 와인을 시킬 때 알아봤어야 되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 생선 요리에는 화이트 와인, 육류 요리에는 레드 와인을 곁들이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혹은 전통적인 마리아주(marriage)다. 그것조차도 모르는 그랜트는 영국정보부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게 007의 추론인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 이어지는 격투 끝에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007이다. 그리고 그랜트가 간첩(!)인 것은 맞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리아주 좀 못 맞춘다고 대뜸 간첩으로 단정짓다니, 이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레스토랑에서 요리나 와인을 주문할 때 007에게 맞아죽지 않으려면 식은 땀 깨나 흘리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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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2009년 2월 8일

김정한

2009.02.03 01:29
*.47.197.8
촬영 당시 21세였던 이탈리아의 여배우 다니엘라 비앙키가 첫번째 사진에 나온 여배우인가요?
흠... 진찌 미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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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9.02.03 01:37
*.201.16.117
응 맞어 쟤가 걔야...
아니지, 한참 연상의 배우한테 이런 말하면 안되지...
똑똑하고 예쁘고 섹시한 여배우야...
흠 겨우 21살에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놀라워라!^^

조현옥

2009.02.11 01:57
*.53.218.52
크게 두가지 일에 바쁘긴 선생님이나 007이나 마찬가지 인데, 설마 때리기야 할랴구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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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9.02.11 14:20
*.131.158.52
내가 바쁜 두 가지 일은 뭘까...잠시 궁금해지네
카드와 와인인가...?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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