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8-12-12 02:09:33 IP ADRESS: *.131.15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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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집사가 깨뜨린 와인
심산의 와인예찬(48) [남아있는 나날](제임스 아이보리, 1993)의 다우 포트 1913

이런 저런 와인교육기관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와인업계에서 일하는 후배들이 많아졌다. 어떤 이는 소믈리에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이는 매니저라는 직함을 달았다. 능숙하게 그 일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누가 보기에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들도 있다. 후자들에게 나는 늘 말한다. “[남아있는 나날]에 나오는 앤소니 홉킨스를 좀 보고 배워.”

와인병의 코르크를 따는 도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흔히 ‘웨이터스 프렌드’ 혹은 ‘소믈리에스 프렌드’라고 불리우는 것이 가장 많이 쓰이는데, 스크류가 달려 있고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코르크를 따는 도구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지만 코르크 가운데에 스크류를 박아 넣는 대신 양 옆으로 두 개의 얇은 날을 밀어 넣은 다음 단번에 그것을 빼내는 도구도 있다. 이름하여 ‘버틀러스 프렌드’이다. 그런데 버틀러가 뭐냐고? [남아있는 나날]에 나오는 앤소니 홉킨스의 직함이다.

[남아있는 나날]을 논하려면 먼저 그것을 쓰고 찍고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시나리오작가는 루스 프로어 자발라이고, 감독은 제임스 아이보리이며, 제작자는 이스마엘 머천트인데, 흔히 이들 셋을 가리켜 ‘환상의 삼각편대’라 일컫는다. 이들은 지난 40여년 간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독창적인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해왔는데 [보스턴사람들](1984), [전망 좋은 방](1986), [모리스](1987), [브리지 부부](1990), [하워즈 엔드](1992)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1993)이 이들의 대표작이다.

나는 예전에 이들의 작품 세계를 ‘담담히 지켜본 한 계급의 소멸’이라고 압축하여 표현한 바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다시 한번 [남아 있는 나날]을 들여다보니 여전히 유효한 정의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다루는 시대적 배경은 대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른바 ‘대영제국의 영광’이 저물어가고 있던 나날들이다. 덕분에 이들의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은 대개 모순덩어리로 표출된다. 그들을 지켜보노라면 ‘좋았던 옛시절’에 대한 향수, ‘소멸되어 가는 계급’의 쓸쓸한 뒷모습, 그리고 ‘진지해서 더욱 우스꽝스러운 인간’에 대한 연민 따위가 매우 복잡하게 착종되는 것이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인물은 물론 제임스 스티븐스(앤소니 홉킨스)이다. 그는 주인인 달링턴 경(제임스 폭스)의 대저택 살림 전체를 책임지고 있다. 이러한 직함을 영어로는 버틀러(butler)라고 부르고 우리 말로는 집사(執事)라고 한다. 요즘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직종이다. 집사는 어떤 일을 하는가? 한 마디로 ‘모든 일’을 다 한다. 그는 주인의 개인 비서이고, 하인들과 하녀들의 지휘자이며, 온갖 리셉션의 숨겨진 호스트이고, 대저택 지하 와인셀러의 관리자이기도 하다.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이고, 치밀한 조직가이며,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고, 감정이 없는 로봇이기도 하다.

[남아있는 나날]에는 짧게 비춰지지만 인상적인 와인신들이 여럿 나온다. 1936년, 달링턴 경의 대저택에서는 ‘비공식적인’ 국제회의가 열린다. 독일의 재무장에 대한 각국의 의견들을 조율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국제정세 따위는 스티븐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손님들을 맞고 그들에게 멋진 정찬을 제공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다. 이때 그가 준비한 최고급 와인은 포르투갈의 포트 그레이엄(Graham's)이었다.

정찬 직전에 그가 체크하는 항목들을 보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는 식탁 끝에서 와인잔까지의 거리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일일이 자를 가지고 다니며 그것을 잰다. 미국의 상원의원 잭 루이스(크리스토퍼 리브)가 건배를 제의할 때 그의 잔에 담겨져 있는 것은 물론 샴페인이었다. 만찬이 끝나고 여흥시간이 도래했을 때 스티븐스는 무엇을 하는가? 디저트 와인을 디캔터에 담아 거실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그것을 따라준다. 스티븐스에게 있어서 그 일은 방금 임종한 부친의 눈을 감겨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img2]

[남아있는 나날]에서 단 한번 스티븐스가 자제력을 잃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있다. 오랜 세월 그를 짝사랑해왔고 자신 역시 연모의 정을 품어왔던 하녀장 메리 켄튼(엠마 톰슨)이 다른 남자와의 결혼 소식을 알려왔을 때였다. 스티븐스는 예의 그 단정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결혼을 축복해준다. 그리고는 비틀비틀 지하로 내려간다. 주머니에서 커다란 열쇠를 꺼낸다. 바로 이 대저택 와인셀러의 열쇠이다. 셀러 입구에는 그곳에 보유하고 있는 와인들의 리스트가 언뜻 보인다. 월러스 사(T.F. Wallace & Co.)가 만든 1914년 빈티지의 로제 와인, 그리고 세계 3대 강화와인으로 꼽히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Madeira).

셀러 안에서 스티븐스는 라벨도 너덜너덜해지고 먼지가 뽀얗게 앉은 와인 한 병을 집어들고 잠시 망설인다. 주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이 와인을 마셔도 좋을 것인가? 그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그 와인을 들고 나온다. 하지만 너무도 절망하고 흔들린 나머지 계단을 오르다가 그 병을 놓쳐버린다. 처참하게 깨진 병조각 사이로 검붉은 와인들이 사방으로 튄다. 스티븐스가 짐승처럼 소리지른다. “이런 염병할!(Oh, Damn It!)"

스티븐스가 깨뜨린 그 와인은 포르투갈의 빈티지 포트 다우 1913(Dow's 1913 Vintage Port)이었다. 깨져버린 다우 1913과 일그러진 스티븐스의 표정이 못내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화를 냈던 것일까? 그 값비싼 빈티지 포트를 깨버려서? 평생 처음 주인 몰래 사익을 챙기려한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 때문에?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을 뿐 발설 한 번 못해본 사랑이 이제 막 자신을 떠나가려 하기 때문에? 답변이 쉽지 않다. 다만 가슴이 미어질 뿐이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소믈리에 혹은 매니저들에게 나는 권한다. 스티븐스처럼 일하라. 하지만 이 한 마디는 반드시 덧붙여야만 하겠다. 스티븐스처럼 살지는 말아라. 너 자신의 다우 1913을 깨뜨리지는 말아라.

[중앙SUNDAY] 2008년 12월 14일

김경선

2008.12.13 01:27
*.176.125.80
"이런 염병할!(oh, Damn It!)" 놓쳐버린 게 뭔지도 파악이 안되네...-_-;;;
"남아있는 나날" 이란 제목 자체가 쓸쓸하지 않나요?
profile

심산

2008.12.13 03:28
*.131.158.52
내 생각에는 우리 말 제목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우리 말 제목에 따르면 뭔가 노년에 혹은 여생에 이루어질 것 같잖아?
[Remains of the Day]는 '시대의 유산' 정도로 번역하는 게 옳지 않을까...?

김주영

2008.12.15 15:21
*.121.66.212
해떨어지는 대영제국의 소멸되어가는 계급..
그래서 영화는 그많은 와인중에 포트를 깨뜨리고..
"이런 빌어먹을" 이라고 외쳤던건가???
버틀러스 프랜드로 포트를 한번 따봐야겠다.
profile

명로진

2008.12.16 02:56
*.129.236.95
오,..,.. 쉿 Shit!

....


앤서니 홉킨스의 연기와
다우 1913 만큼이나
멋진
심샘의 글! ......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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