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8-10-30 18:30:29 IP ADRESS: *.237.8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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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심판
심산의 와인예찬(45) [와인미라클](랜달 밀러, 2008)의 샤또 몬텔레나 1973

미국 와인의 역사는 일천하다.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한 수도사가 캘리포니아의 샌디애고에 멕시코산 포도나무를 심어 소량의 미사용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769년이지만, 본격적인 와인 생산이 시작된 것은 흔히 1848년의 ‘골드러시’ 이후로 본다. 금을 캐러 캘리포니아로 모여든 사람들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자 에라 이 땅에 포도나무나 심어보자 해서 시작된 것이 미국 와인의 역사라는 뜻이다.

와인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에서 와인을 만들어 보겠답시고 꼼지락거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재앙’이었다. 미국인들이 와인을 잘 만들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유럽을 오가며 갖고 다녔던 포도나무의 뿌리에 끔찍한 진드기 ‘필록세라’가 묻어왔기 때문이다. 미국산 포도나무는 이 필록세라에 대하여 자생적 면역력이 있다. 하지만 유럽산 포도나무에게 이 ‘신대륙 출신의 진드기’는 그야말로 쥐약(!)이었다. 덕분에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유럽 전역의 포도밭이 아예 초토화되어 버리고 만다.

미국에서 조금씩 성장하던 와인 산업에 철퇴를 가한 것은 저 유명한 ‘금주령(1920-1932)’이었다. 청교도 계통의 미국 여성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하여 만든 이 한심하고 관념적인 법 덕분에 망한 것은 와인 산업이요 흥한 것은 마피아(!)뿐이다. 1932년 민주당의 집권과 더불어 금주령이 폐기되자 잠깐 숨통이 트이는듯 했으나 곧이어 경제대공황이 들이닥쳤고, 가까스로 그것을 극복해내자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무슨 뜻인가? 결국 미국이 제대로 와인 산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1950년대 이후라는 말이다.

미국 와인의 급성장은 실로 경이롭다. 천혜의 자연조건, 막강한 자금력, 놀라운 과학기술, 그리고 무시무시한 정보력 덕분에 가능했던 쾌거다. 와인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런 농담마저 나돈다. “미국 와인은 CIA와 NASA의 합작품이다.” 캘리포니아의 와인 생산자들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자신들의 와인에 대하여 뿌듯해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변방의 이야기’였을 뿐이다. 유럽의 유서 깊은 와인 가문들은 캘리포니아의 촌놈 혹은 쌍놈(!)들이 만드는 와인 따위는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서 한 가닥 한다는 와인생산자들이 프랑스 보르도에서 샤또 무똥로쉴드를 만들고 있던 바롱 필립 드 로쉴드를 찾아가 자신들이 만든 와인을 시음하고 평가해달라고 애원한 것은 1972년의 일이다. 바롱 필립은 그들이 권한 와인들을 찔끔찔끔 맛 보고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들이 만든 와인은 어떤 품종을 사용했건 상관없이 모두 코카콜라 맛이 나는구만?” 미국 와인에 대한 프랑스의 평가는 그랬다. 더 없이 잔혹하고 오만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와인생산자들은 크게 낙담했지만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속 자신들의 와인을 마셔보라며 프랑스를 들쑤시고 다녔다. 그들의 발악(?)을 실소와 냉소로만 받아넘기던 프랑스인들이 어느 날 흥미로운 이벤트를 마련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서 미국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품질을 냉정하게 평가해보자는 것이다. 와인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치명적인’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꼽히며 훗날 ‘파리의 심판’이라 명명된 이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img2]

1976년 5월 24일의 일이다. 프랑스 파리의 인터콘티넨탈 호텔의 한 작은 방에는 한 시대를 호령하던 와인전문가 9명이 모여 있었다. 레드 와인 부문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 베이스트 와인, 화이트 와인 부문에서는 샤르도네 와인을 시음하기로 하고, 각 부문마다 프랑스 와인은 4병, 미국 와인은 6병씩 출전시켰다. 와인들은 모두 디캔팅하여 라벨을 볼 수 없도록 하였으며, 시음 순서는 추첨을 통해서 정해졌다. 이를테면 최대한 객관적으로 와인의 품질을 평가하도록 한 것이다.

먼저 레드 와인 부문을 살펴보자. 샤또 무똥로쉴드 1970, 샤또 오브리옹 1970, 샤또 몽로즈 1970, 샤또 레오빌 라스까스 1971. 의심의 여지가 없는 ‘프랑스 국가대표’급이다. 미국에서 출품한 레드 와인 6병? 당시만 해도 그저 ‘이름 없는’ 와인들이었을 뿐이다. 화이트 와인 부문에 출품된 프랑스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라모네-프루동 바타르-몽라셰 1973, 도멘느 르플레브 퓔리니-몽라셰 레 퓌쎌 1972, 조셉 드루엥 본느 클로 데 무슈 1973, 룰로 뫼르소 레 샤름므 1973. 미국에서 출품한 화이트 와인들? 언급할 가치도 없다. 적어도 이 날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참가했던 프랑스의 와인전문가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경천동지’할 사건이 벌어졌다. 레드 와인 부문과 화이트 와인 부문 모두 ‘이름 없는’ 캘리포니아 와인이 ‘전통과 명성’의 프랑스 와인들을 제치고 당당히 1등을 차지한 것이다. 프랑스 와인전문가들의 낯빛이 똥색으로 변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서둘러 그 결과를 덮어버리려 했다. 만약 그 자리에 [타임]지의 프랑스 특파원이었던 미국인 조지 테이버가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그냥 쉬쉬(!)하며 덮어졌을 것이다. 조지 테이버는 즉각 이 사실을 특종으로 대서특필하여 미국으로 보냈는데, 그때 그가 쓴 기사의 제목이 바로 ‘파리의 심판’이었다.

당시 레드 와인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한 와인은 캘리포니아의 스택스 립 와인 셀러스 1973이었고, 화이트 와인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한 와인은 역시 캘리포니아의 샤또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 1973이었다. 미국의 랜달 밀러 감독이 만들어 올해 칸느영화제에서 선 보인 영화 [와인미라클]은 이 ‘파리의 심판’이라는 역동적인 드라마를 그야말로 유쾌상쾌통쾌(!)하게 보여준다. 지난 가을의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된 바 있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전국의 와인애호가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던 바 있다

내가 쓴 위의 글이 파리의 심판을 ‘거시적으로’ 다루었다면, 영화 [와인미라클]은 그것을 ‘미시적으로’ 다룬다. 이 영화 속의 와인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지면관계상 다음 회로 미루어야만 하겠다. 영화의 제목은 국내 수입사가 갖다 붙인 것이고 원제는 ‘보틀쇽(Bottle Shock)'인데, 와인의 병입이나 이동 과정에서 색과 향이 일시적으로 약간 변질되는 것을 뜻하며, 흔히 '보틀 시크니스(Bottle Sickness)'라고도 부르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국내 개봉이 코 앞으로 닥쳤다고 하니 본의 아니게 영화 홍보성 글이 되고 말았다. 영화 수입사는 이 기사를 읽는 즉시 내게 샤또 몬텔레나 한 상자를 보내주기 바란다(ㅋㅋㅋ).

[중앙SUNDAY] 2008년 11월 2일

[img3]

조현옥

2008.10.30 20:37
*.53.218.52
햐~ '필록세라' 며, '파리의 심판' 이며, 와인의 역사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네요!

(추신: 그렇다! 수입사는 심쌤께 샤또 어쩌구를 한 상자 보내주시길 바란다!)

김희자

2008.10.30 23:36
*.10.111.224
샤또 몬텔레나를 나눠먹고 싶은 1人...ㅡ,ㅡ
profile

심산

2008.10.31 03:16
*.131.158.52
나 얼마 전에...그러니까 한미정상회담 오찬 공식와인으로 샤또 몬텔레나 2005가 선정된 바로 다음날
와지트에서 이 와인을 마셨는데...걍 한 마디로 요약하면..."졌다!"^^
모든 이에게 자신 있게 강추(!)할 수 있는 와인!
그런데 문제는 값이 만만치 않다는 거...ㅠㅠ

김경선

2008.11.03 02:13
*.176.113.34
수입사가 심산샘께 샤또 어쩌구를 한상자 보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산샘이 샤또 어쩌구의 시음회에 나를 초대해 줄 것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쁘지만...나는 반드시 시음회에 참석해야한다.
profile

심산

2008.11.04 04:15
*.131.158.52
경선, 꿈 깨...영화 수입사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어...[우우][통곡]
참고로...수입사는 미로비전이야![원츄][파안][깔깔]

심정욱

2009.06.13 14:04
*.174.6.153
오늘 집에서, Bottle Shock을 봤습니다.
삼촌 홈피에서 이 글을 본 기억이 있어서 잠시 들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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