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신 로마네 콩티
심산의 와인예찬(11) 꿈이었던가 생시였던가
워낙 백수 내지 한량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다보니 별의별 희한한 인연들이 다 있다. 문학동네 사람들, 영화동네 사람들, 산동네 사람들, 와인동네 사람들에 덧붙여 온갖 직업과 계급 그리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오게 된 것이다. 부산에서 ‘한 주먹’하는 큰 형님을 알게 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십 년도 더 전에 부산에서 로케 문제로 동네 양아치들과 티격태격하다가 그만 달랑 들려 끌려간 곳에서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대면한 것이 첫만남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배포가 맞아 여지껏 서로 형님 아우 하면서 즐겁게 지낸다. 그 형님의 이름을 콩티(Conti)라고 해두자.
겉으로 보면 콩티 형님은 그야말로 쫙 빼입은 신사다. 나는 여지껏 아르마니 재킷이 그토록 멋지게 어울리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오죽 했으면 나와 동행했던 이른바 스크린 스타들도 우와 스타일 죽인다(!)면서 혀를 내둘렀겠는가. 외모는 또 어찌나 근사한지 이따금 룸살롱에라도 동행할라치면 그 쭉쭉빵빵 잘빠진 아가씨들이 죄다 기성을 질러대며 오빠부대로 돌변한다. 하긴 그 룸살롱 자체가 콩티 형님의 소유이니 그렇게 오버하는 반응을 안보이면 또 어쩔텐가 싶기도 하다. 콩티 형님은 발군의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스킨스쿠버에서 경비행기 운전까지, 골프에서 검도까지, 도대체 못하는 게 뭘까 싶을 정도로 방방 뜬다. 골프만 해도 국내 정상급의 프로골퍼들과 내기골프를 쳐서 돈을 따는 정도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하긴 콩티 형님한테 내기골프로 돈을 땄다가는 목구멍에서 항문까지 골프채가 관통할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싶기도 하다.
삼년 쯤 전의 일이다. 콩티 형님이 모처럼 전화를 해왔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야 산아, 어떤 시러배 아들놈이 나한테 뭔 포도주를 딸랑 한병 보내왔는데 말이다...내용인즉슨 이렇다. 어떤 놈이 재건축 문제로 골머리를 끙끙 싸매고 있길래 우리의 콩티 형님이 전화 몇 통화를 돌려 간단하게 그 문제를 해결해줬단다. 보통 이런 일이 있고나면 간단한 답례차 접대골프(물론 내기골프를 쳐서 져줘야 하지만)를 몇 번 쳐주든가 근사한 술을 몇 병 갖다 바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이 ‘시러배 아들놈’은 조니워커 블루도 아니고 발렌타인 30년도 아니고 딸랑 포도주 한 병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내가 상자를 열어보고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당장 담궈 버릴라고 그랬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해. 배때지에 철판을 깐 놈도 아닌 거 같고, 그렇게 경우 없는 놈도 아닌 거 같고...혹시 이 포도주가 쫌 괜찮은 게 아닐까 싶어서 너한테 전화를 했다. 니가 와인 좀 안대메?
라벨에 뭐라고 써 있어요? 나는 말을 뱉고 나서 즉시 아차, 했다. 어느 분야에서건 가방끈 긴 척 하는 녀석들을 제일 싫어하는 게 우리 형님이다. 라벨이고 나발이고 그런 건 나 모르겠고...무슨 ‘로마’꺼 같은데? 순간 내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로마? 혹시...로마네 콩티라고 써있나요? 형님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그래, 뭐 그거 비슷해...이게 좋은 거야? 나는 싸가지 없게도 말을 대뜸 잘라먹었다. 형님, 빈티지! 아니...음...거기에 뭐 숫자 같은 거 안 써있어요? 2000이라든가 2001이라든가...콩티 형님이 숫자만은 자신 있게 읽어줬다. 1985라고 써 있는데? 나는 하마터면 꽥 소리를 지를 뻔 했다. 1985? 분명히 1985라고 써 있는 거 맞아요? 내 목소리가 너무 흥분해 있었던 까닭에 형님도 ‘감’을 잡은 거 같았다. 야 임마, 귀청 떨어지겠다! 내가 숫자도 못 읽을 것 같냐? 1985 로마 어쩌구 맞아, 이거 좋은 거야?
[img3]나는 아마도 입에 게거품을 물었던 거 같다. 나는 마치 로또에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로마네 콩티 1985에 대한 장황한 예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형, 그거 엄청난 와인이야! 지금 손에 들고 있어? 당장 테이블 위에 내려놔, 아니 아니, 소파 같은 데 눕혀놔...혹시 잘못해서 그거 깨지면...어흑, 생각도 하기 싫다! 형, 뭐 조니워커 블루? 발렌타인 30년? 그런 건 쨉도 안돼! 그건 돈 있어도 못사는 와인이야! 로마네 콩티는 아무리 후져도 500만원은 넘어가는데 1985년 빈티지면 2000만원도 더 할 거야! 형, 만약 그거 나 없을 때 따면, 나 평생 형님 얼굴 안 볼꺼야! 내가 하도 호들갑을 떨어가며 설레발을 쳐대니 콩티 형님도 기분이 무척 좋아진 것 같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나를 약 올렸다. 근데 어쩌냐? 오늘 밤에 딸 건데? 내 대답이야 이미 정해졌다. 형, 기다려! 내가 당장 비행기 타고 내려갈께!
때마침 금요일 저녁이었다. 부산행 비행기 좌석은 이미 매진된 다음이다. 하지만 로마네 콩티 1985가 이제 막 개봉되려 한다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랴? 나는 아시아나 조종사로 일하는 처남, 대한항공 티케팅 오피스에서 근무하는 후배, 심지어 내 보험 담당 파이낸스 플래너까지 총동원하여 기어코 부산행 비행기의 좌석 하나를 쟁취해냈다. 김포에서 부산까지의 비행시간이라야 몇 분 안된다. 그 몇 분이 내게는 영겁의 세월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내 평생 가장 감미로왔던 기다림과 설레임의 시간을 꼽으라면 당근 그날 저녁의 비행시간이다. 오, 로마네 콩티! 내 일찍이 그대의 아명(雅名)을 넌짓 전해들은 이후 잠들지 못했던 밤이 그 몇 날이던가? 로마네 콩티하고도 1985! 그대의 전설적인 빈티지를 내 살아생전에 조우하게 될 줄이야 그 누가 꿈에서라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공항에서 약속장소인 대형 룸살롱이 있는 서면까지 어떻게 날라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숨이 턱에까지 찬 채로 약속장소의 문을 우당탕 열어젖히며 들이닥치니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가관이었다. 우리의 콩티 형님이 물론 제일 상석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양 옆으로는 부산에서 제법 힘 깨나 쓴다는 인간들이 근사한 양복에다가 넥타이를 졸라매고 [대부]에나 나옴직한 자세로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그곳에 헐레벌떡 들이닥친 나는 산발한 머리에다가 반바지에 샌달 차림이었던 것이다. 콩티 형님의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 눈썹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 저 백수 건달 새끼, 하여튼 못 말려. 하지만 형님은 일언이폐지왈 하고 나를 멋지게 소개해줬다. 아, 쟤는 산이라고 내 동생인데, 와인을 쫌 잘 아는 놈이라서 내가 특별히 불렀어. 야 산아, 이게 어떤 술이라고? 네가 설명 좀 해봐라.
로마네 콩티 1985를 내 손 안에 쥐니 꿈만 같았다. 나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 ‘신의 물방울’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 애썼다. 전세계의 와인 애호가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바로 그 도멘느 드 라 로마네 콩티(Domaine de la Romanee-Conti)사의 명품으로서...하지만 콩티 형님은 내 말을 싹뚝 잘라버렸다. 그래서, 이게 얼마짜리라는 거야? 나는 수준에 맞는 설명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발렌타인 30년 100병하고도 못 바꿉니다. 좌중에서는 그제서야 찬탄이 일었다. 뿐만 아니라 돈이 있어도 못 사요. 좌중에서는 이제 숭배의 분위기가 일었다. 하지만 그 숭배의 대상은 와인이 아니라 콩티 형님이었다.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말했다. 이런 귀한 술자리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구청의 건축허가 담당 공무원은 아예 무릎까지 꿇을 기세였다. 콩티 형님, 오늘의 은혜는 백골이 난망입니다! 콩티 형님의 똘마니이자 그 룸살롱의 고용 사장이었던 자는 와인을 따르면서 손을 덜덜 떨었다. 콩티 형님이 보스답게 농담을 던졌다. 야 임마 제대로 잘 따라, 그거 한 방울이 니 놈 피보다 더 비싼 거라잖아, 하하하.
[img2]진정한 비극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6개의 잔에 따라진 로마네 콩티 1985를 경건하게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콩티 형님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아따 뭔 제사 지내냐? 자, 시원하게들 들자구, 원샷!” 나는 하마터면 악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하지만 내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5개의 잔은 홀라당 비워졌다. 오직 나만 혼자 그 잔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 뿐이다. 머리 위로 잔을 올려 털어낸 5명의 사내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콩티 형님의 짙은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그의 눈빛이 싸아~하게 변해가기 시작한 순간, 나는 눈을 질끔 감고 내 잔에 담긴 그 ‘신의 물방울’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어이없음과 충격, 슬픔과 분노, 그리고 코미디와 비극이 제멋대로 뒤섞여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점입가경이다. 룸살롱 사장이 ‘형님의 은혜를 갚고자’ 지옥의 폭탄주 세례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물론 그 모든 폭탄주들을 다 마셔야만 했고 결국엔 정신을 잃었다. 오오 주여, 내가 과연 로마네 콩티 1985를 마시기는 마신 겁니까?
[무비위크] 2007년 4월 2일
크크크크..
어찌 이런 우연이..
방금 2차 자리에서 바로 이 로마네꽁띠 이야기 하고 왔는데....와보니 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