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8-29 21:24:56 IP ADRESS: *.215.228.50

댓글

0

조회 수

3169



[img1]

고통과 냉소의 저술광
프레드릭 라파엘(Frederic Raphael, 1931-    )

프레드릭 라파엘은 시나리오 작가 겸 소설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저술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는 여지껏 40권에 육박하는 저서들을 썼으며, 그중에서 장편 소설만 19권이고, 그 외에 에세이와 평론 그리고 전기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고 있다. 그가 쓴 서머싯 몸과 바이런의 전기는 이 방면의 수작으로 꼽힌다.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라파엘은 복잡한 내면세계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각색하는데 탁월하기로 유명하다. 즉 도저히 영상화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스크린 위로 옮기는 데 특별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라파엘은 미국의 시카고 출생이지만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으며 그 이후로도 생애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내고 있는 특이한 작가다. 그의 장편 소설은 심하게 왜곡된 상황에서 도출된 고통스러운 유머, 빠른 템포의 대사, 그리고 현학적이고 냉소적인 캐릭터들로 특징지워진다. 시나리오 데뷔작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온 독일 청년의 분방한 연애담을 그린 [버철러 오브 하트]이다. 두번째 작품인 [나싱 벗 더 베스트]는 스탠리 엘긴이 쓴 블랙코미디의 걸작을 각색한 영국식 코믹살인극으로 숨겨진 시체를 놓고 벌이는 영국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과 멍청함을 마음껏 조롱한다.

그는 [달링]으로 아카데미 상을 받으면서 할리우드 일급작가의 대열로 급부상한다. 신분상승을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배신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매혹적이되 가련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의 한 전범으로 꼽힐 만하다. 토머스 하디 원작의 [우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는 [달링]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고스란히 다시 모여 만든 작품이었지만 흥행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당시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던 누벨바그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받아들인 작품이 [투 포 더 로드]. 오드리 헵번이 청순한 음악학도로 나오는 이 영화는 헨리 맨시니의 유명한 주제곡으로 오랫동안 기억된다. 오마주에 대한 오마주라고나 할까? 훗날 거꾸로 누벨바그의 주역이었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사랑의 묵시록]에서 재인용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img2]

70년대로 넘어오면서 라파엘의 작품세계에는 어두운 음영이 짙게 깔린다.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뒤틀린 남녀관계를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참수]는 아내와 이복여동생과 정신과 상담의 사이에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내연의 관계들을 음울하게 묘사한 작품. 그리고 [데이지 밀러]는 스위스의 온천 휴양지에서 만난 바람둥이 아가씨에게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계속 빠져 들어가는 괴로운 연애담을 그렸지만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의 실패작으로 꼽힌다. 본인의 장편 소설을 직접 각색한 [리처드가 남긴 것]에서는 남편이 죽자 슬픔에 빠진 미망인이 남편이 숨겨두었던 정부를 만나면서 그녀와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화이트 미스치프]는 1940년대의 케냐를 배경으로 하여 마약과 스와핑으로 점철된 데카당스한 삶을 살던 영국 부르주아를 다룬 작품이고, [왕의 정부]는 17세기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신하의 아내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왕의 이상심리를 파헤친 작품이다.

이쯤되면 어째서 라파엘이 스탠리 큐브릭의 마지막 파트너로 간택(?) 되었는지가 자명해진다. 복잡한 내면상태를 그린 문학작품을 영상으로 옮기고 이상심리로 치닫는 남녀관계를 파고드는 데에서는 라파엘을 뛰어넘을 작가가 없다. 미국인이면서도 영국에 틀어박혀 오직 창작에만 집중하고 있는 편집광적인 자세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도 그들의 파트너십을 설명하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 파트너십의 결말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라파엘은 저술광답게 큐브릭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와의 창작 과정을 소상히 밝힌 『아이즈 와이드 오픈』(국내에서는 1999년에 출간되었다)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 책의 일부 내용이 유족과 큐브릭 마니아들의 격렬한 반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궁금하다. 지하에 누워 있는 큐브릭은 과연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을까 부릅 뜨고 있을까?

[img3]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58년 울프 릴라의 [버철러 오브 하트](Bachelor of Heart)
1964년 클리브 도너의 [나씽 벗 더 베스트](Nothing But The Best)
1965년 존 슐레진저의 [달링](Darling)ⓥ★★
1967년 존 슐레진저의 [우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Far From The Madding Croed)
          스탠리 도넌의 [투 포 더 로드](Two For The Road)★
1971년 딕 클레멘트의 [참수](A Severed Head)
1974년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데이지 밀러](Daisy Miller)
1981년 앤서니 하비의 [리처드가 남긴 것](Richard's Thing)
1987년 마이클 레드퍼드의 [화이트 미스치프](White Mischief)
1990년 악셀 코르티의 [왕의 정부](La Putain du Roi)
1999년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수상작

[씨네21] 2000년 10월 31일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6 시나리오의 3대 요소? 구조, 구조, 구조!/William Goldman(1931- ) + 6 file 심산 2006-09-05 5163
45 너무 일찍 성공한 작가/Scott Rosenberg(1964- ) file 심산 2006-09-02 4046
44 거친 사내의 아메리칸 드림/Joe Eszterhas(1944- ) file 심산 2006-09-02 3457
43 고칠 수 없을 때까지 고쳐쓴다/Bruce Joel Rubin(1943- ) file 심산 2006-09-02 3408
42 그대 안의 포르노그래피/Patricia Louisiana Knop(1947- ) file 심산 2006-08-29 4031
41 손맛을 신봉하는 정공법의 달인/Bo Goldman(1932- ) file 심산 2006-08-29 3280
» 고통과 냉소의 저술광/Frederic Raphael(1931- ) file 심산 2006-08-29 3169
39 블랙리스트 작가의 멋진 복수극/Walter Bernstein(1919- ) file 심산 2006-08-29 4054
38 흑백TV시절 안방극장의 단골손님/Daniel Taradash(1913-2003) file 심산 2006-08-29 3473
37 전세계의 감독들을 지휘하다/Jean Claude Carriere(1931- ) + 1 file 심산 2006-07-27 3451
36 마음을 닫고 사는 보통사람들/Alvin Sargent(1952- ) file 심산 2006-07-27 4413
35 인간의 심연을 파고드는 스릴러/Ted Tally(1952- ) file 심산 2006-07-27 3479
34 담담히 지켜본 한 계급의 소멸/Ruth Prawer Jhabvala(1927- ) file 심산 2006-07-27 3304
33 아버지와의 섀도복싱/Nicholas Kazan(1946- ) file 심산 2006-07-27 3455
32 만화와 영화의 경계를 허물다/David Goyer(1968- ) file 심산 2006-07-25 3386
31 미국 남부의 정서와 풍광/Horton Foote(1916- ) file 심산 2006-07-25 3760
30 무성영화시대를 통과하여 살아남은 장인/Ben Hecht(1893-1964) file 심산 2006-07-25 3379
29 개성 없다고? 기다려봐!/Eric Roth(1942- ) file 심산 2006-07-25 3119
28 상처를 응시하는 불안한 눈동자/Paul Schrader(1946- ) file 심산 2006-07-12 3560
27 뒤틀린 코미디의 썰렁 브라더스/Scott Alexander(1963- ) & Larry Karaszewski(1961- ) file 심산 2006-07-12 3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