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8-29 20:34:35 IP ADRESS: *.215.22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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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TV시절 안방극장의 단골손님
대니얼 태러대슈(Daniel Taradadh, 1913-2003)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늙은 아버지(신구)는 비디오 리모컨을 사용할 줄 모른다. 죽어가는 아들 정원(한석규)는 아버지에게 리모컨 사용법을 가르치다가 감정을 못 이겨 버럭 화를 내고는 방을 뛰쳐나간다. 시종 가슴을 저리게 했던 이 영화 중에서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영화를 보고 싶어했을까? “지상에서 영원으로. 거 왜 네 에미하고 같이 봤잖니.”

[지상에서 영원으로]만큼 ‘추억의 명화’라는 표현에 꼭 들어맞는 영화도 따로 없을 것이다. 나도 흑백 TV가 고작이었던 시절에 무슨 명절 때마다 걸핏하면 방영되던 이 영화를 보고 또 보던 기억이 새롭다. 대니얼 태러대슈(Daniel Taradash)는 이 영화말고도 [피크닉]이나 [하와이]처럼 낯익은 작품들을 가지고 우리의 안방극장을 자주 찾아왔던 단골손님이다.

태러대슈는 법학공부를 하는 틈틈이 써온 희곡이 예기치 않게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데뷔작은 [골든 보이](1939)였다. 한 권투선수의 죽음을 다룬 남성적인 영화이며 윌리엄 홀든의 스크린 데뷔작이기도 하다. 험프리 보가트가 세운 영화사인 ‘산타나’의 첫번째 영화 [낙 온 애니 도어]는 태러대슈의 출세작이자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살인죄로 기소된 반항적 젊은이 존 데릭과 그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베테랑 변호사 험프리 보가트의 불꽃 튀는 연기대결은 그 당시 큰 화제였고,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오른 존 데릭의 자기파괴적 대사 “짧게 살고 멋지게 죽을 테야!”는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감독인 니콜라스 레이는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존 데릭의 캐릭터를 좀더 발전시킨 것이 지금까지도 청춘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 없는 반항](1955)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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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에 태러대슈는 당대의 여배우 두 명을 모두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에 출연시킨다. 마를렌느 디트리히는 서부극 [악당 란초]에서 매혹적인 술집 여가수로 나와 자신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마릴린 먼로는 [돈 바더 투 낙]에서 기존의 섹스심벌 이미지를 버리고 진지한 연기자로 탈바꿈한다. 태러대슈에게 아카데미를 안긴 것은 유명한 [지상에서 영원으로]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봤던 이 영화의 해변키스신은 충격이었다. 아니, 유부녀가, 그것도 자기 남편의 부하와, 해변에서 뒹굴면서 키스를 하다니! 나이가 들어 다시 봐도 과연 명불허전이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들, 계급간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일본의 진주만 습격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망가져 가는 인간군상을 스케일 큰 화면 속에 자유자재로 그려넣은 솜씨가 놀랍다.

[데지레]와 [모리투리]에서는 말론 브란도의 메소드연기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고, [종과 책과 촛불]에서는 같은 해 [현기증](1958)에서 멋진 호흡을 보여주었던 제임스 스튜어트와 킴 노박의 코믹연기를 맛볼 수 있다. 유일하게 감독을 했던 [스톰 센터]는 메카시즘의 횡포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사회물인데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모두 쓴 잔을 마셨다. [캐슬 킵]은 벨지움의 한 고성으로 잠입한 특수부대원들이 뜻밖의 휴가를 얻어 천진난만한 소년으로 되돌아간다는 내용의 독특한 전쟁영화로, 이탈리아 영화 [지중해](1991)의 원형 정도로 여기면 된다.

시드니 셀던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깊은 밤 깊은 곳에]와 험프리 보가트의 일대기를 그린 TV용 영화 [보기]를 끝으로 작품들이 더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제 노익장 태러대슈의 손끝에서도 힘이 다 빠져나간 모양이다. 대니얼 태러대슈는 할리우드 황금기라고 불리던 스튜디오 시대의 마지막 작가군에 속한다. 클리포드 오데츠나 바바라 스탠윅 같은 전설적인 배우들과 함께 영화일을 시작하여 다이언 캐넌이나 수잔 서랜든 같은 신출내기 배우들이 막 스크린에 입문할 때까지 작가의 자리를 지켰으니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나리오를 써온 것이다. 그쯤되면 지상에서 영원으로 옮겨갈 때 뿌듯한 마음이 들 것도 같다.

[img3]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49년 니콜라스 레이의 [낙 온 애니 도어](Knock on Any Door)
1952년 프리츠 랑의 [악당 란초](Rancho Notorious)
          로이 워드 베이커의 [돈 바더 투 낙](Don't Bother to Knock)
1953년 프레드 진네만의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
1954년 헨리 코스터의 [데지레](Desiree)
1955년 로슈아 로건의 [피크닉](Picnic)
1956년 대니얼 태러대슈의 [스톰 센터](Storm Center)
1965년 번허드 위키의 [모라투리](Moraturi)
1966년 조지 로이힐의 [하와이](Hawaii)
1969년 시드니 폴락의 [캐슬 킵](Castle Keep)
1977년 찰스 재럿의 [깊은 밤 깊은 곳에](The Other Side of Midnight)ⓥ
1980년 빈센트 셔먼의 [보기](Bogie)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수상작

[씨네21] 2000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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