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7-25 15:32:19 IP ADRESS: *.51.16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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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영화의 경계를 허물다
데이비드 고여(David Goyer, 1968- )

"포스트-포스트-포스트-모던이지요" [블레이드]라는 영화의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해보라는 질문에 데이비드 고여가 되돌려준 대답이다. 과연 신세대답게 자기과시적이고 희화화한 발언이지만 그저 속없는 농담일 뿐이라고 일축해버릴 수만도 없다. 실제로 [블레이드]를 보라. 정신사납다. 호러 같기도 하고 SF 같기도 하고 누아르 같기도 한데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만화 같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원작이 만화였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적 표현 자체가 만화 같다는 뜻이다. 도대체 이런 영화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온갖 장르영화의 컨벤션들을 익살스럽게 변형하고 베낀데다가 만화까지 버무려넣은 요상한 잡탕비빔밥!

요상하고 낯선 어떤 것과 마주쳤을 때의 반응이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혐오하고 기피하거나 흥미를 느끼고 마음을 여는 것. 나는 후자에 선다. 모든 패러다임은 그 변화의 초기에 요상하고 낯설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MTV스타일이 최초로 영화에 도입되었을 때 모두들 얼마나 경멸의 시선을 보냈던가? 심지어 토키(유성영화)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도 찬반양론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데이비드 고여 같은 작가들이 불쑥 들이미는 저 요상한 잡탕비빔밥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고 음미해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솔직히 지난 세기말의 뛰어난 영화적 성취라고 상찬받고 있는 [매트릭스](1999)도 바로 이런 종류의 잡탕비빔밥들과 같은 밥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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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고여의 데뷔는 뜻밖에도 손쉬웠다. USC 영화학교에 다니면서 쓴 시나리오 [데스 워런트]가 할리우드에 팔려 영화화된 것이다. 이때 장 클로드 반담과 인연을 맺은 관계로 [어벤저2]의 시나리오작업에도 참여한다. 그러나 이상의 작품들과 [죽음의 땅]은 그저 단순한 액션영화일 뿐이다. 그의 독특하고 위악적인 재능을 확인시킨 최초의 작품은 [악마의 장난감].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부터 [악마의 유희](1988)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호러물들을 패러디하고 뒤섞었다. 장난감 공장에서 벌어지는 호러물인데 심지어 프레디 크루거 인형까지 등장한다. [에이리언 마스터] 역시 호러와 SF를 뒤섞은 퓨전(fusion)장르의 작품. 아이오와의 작은 마을에 침입한 에일리언들과의 싸움을 다루고 있는데 전형적인 B급영화답게 무섭고 웃기고 어이없다.

[크로우]는 널리 알려진 대로 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의 유작. 지옥 같은 세트디자인과 악마적인 록뮤직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로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인데 아무도 손대지 않으려 했던 속편의 시나리오를 고여가 썼다. 이번에도 역시 죽은 자가 까마귀와 함께 부활하여 복수극을 벌인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사실성 내지 개연성을 따지느라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선배 세대의 작가들과는 딴판으로 만화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 작품이다. [크로우2]로 고여의 재능을 높이 산 [크로우]의 감독 알렉스 프로야스와의 만남이 빚어낸 작품이 [다크 시티]. 독일 표현주의식으로 재현한 1940년대의 맨해튼 세트가 일품인데, 프리츠 랑의 [매트로폴리스](1926)를 의도적으로 베껴온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세트로 기록된 이 가상의 공간을 누비는 캐릭터들과 그들에 대한 설정 역시 대단히 만화적이다.

[블레이드]는 뱀파이어에게 살해당한 어머니의 복수를 위하여 뱀파이어 사냥에 나선 웨슬리 스나입스의 이야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인간도 아니고 뱀파이어도 아닌 중간자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제목이 시사하듯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뒤틀어놓았다. “만화, SF소설, 그리고 영화요”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대한 데이비드 고여의 답변이다. 그의 시나리오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녹아들어 있다.

그는 정공법적인 드라마투르기를 경멸하고 혼란스럽기까지 한 잡탕비빔밥을 선호한다. ‘이렇게 해도 될까’ 하며 걱정하기는커녕 ‘이렇게 하면 왜 안 돼’ 하며 되받아치는 스타일이다. 독특한 작품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 미완의 작가인 것도 분명하다. 그의 작품세계를 혐오하는 평론가들은 이렇게 다그친다. 그런 식으로 써가지고는 평생 가야 B급영화밖에 못 만들어! 고여는 고여답게 태연한 낯빛으로 쉽게 대답한다. “B급영화가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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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90년 데런 사라피언의 [데스 워런트](Death Warrant)
1990년 앨버트 피윰의 [어벤저2](Kickboxer2: The Road Back)
1991년 피터 마누건의 [악마의 장난감](Demonic Toys)
1994년 스튜어트 옴의 [에이리언 마스터](The Puppet Masters) ⓥ
1994년 스티븐 시걸의 [스티븐 시걸의 죽음의 땅](On Deadly Ground) ⓥ
1996년 팀 포프의 [크로우2](The Crow: City of Angels) ⓥ
1998년 알렉스 프로야스의 [다크시티](Dark City) ⓥ
1998년 스티브 노링턴의 [블레이드](Blade) ⓥ

ⓥ는 비디오 출시작

[씨네21] 2000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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