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7-25 14:56:42 IP ADRESS: *.51.16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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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없다고? 기다려봐!
에릭 로스(Eric Roth, 1942- )

때로는 저능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포레스트 검프]는 IQ 75의 멍청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되짚어보면서 20세기 후반의 미국사를 반추해보는 독특한 코미디이다. 이 검프라는 녀석의 삶이 역사와 맞물리는 순간들은 어이가 없을 만큼 우연과 궤변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저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령 지체부자유아 시절의 하숙생 청년이 엘비스 프레슬리였고, 무작정 뛰다보니 미식축구의 대표선수가 되었으며, 첫사랑을 끌어안고보니 베트남 반전시위대의 리더가 되어버렸다는 식이다. 다큐멘터리 필름과 연출된 실사영화를 절묘하게 합성시켜 시각효과상을 수상한 것을 포함하여 무려 다섯개 부문에서 오스카를 챙긴 당대 최고수준의 영화였다.

포레스트 검프 역을 맡아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톰 행크스 못지않게 이 영화의 성공에 감격했을 사람은 시나리오 작가 에릭 로스다. 데뷔한 지 20년째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띄엄띄엄 범작만을 발표해왔던 만년 2류작가에게 비로소 할리우드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것이다. 이 전형적인 대기만성형의 작가 에릭 로스의 데뷔작은 LA의 장물처리조직 내부의 암투를 다룬 필름누아르 [니클 라이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었을 만큼 완성도는 높았으나 지나치게 어두운 내용이어서인지 흥행에서는 참패를 기록했다. 1970년대 재난영화의 한축을 이루었던 에어포트 시리즈의 제4탄 [에어포트 79]가 다음 작품. 모스크바올림픽을 배경으로 하여 콩코드기로 기종을 바꾸고 알랭 들롱을 위시한 유럽의 대스타들을 모두 끌어들인 초호화판 블록버스터였으나 시리즈 중 가장 형편없다는 혹평만을 되돌려받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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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스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중심축을 찾아낼 수 없다. 좋게 말하면 그만큼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써왔다는 뜻일 테고, 나쁘게 말하자면 개성 없는 범작순례를 계속해왔다는 뜻이 된다. 할리우드에서 발행하는 성적표는 잔인할 만큼 혹독한 것이어서 데뷔작과 출세작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떨어져 있는 에릭 로스와 같은 작가에게는 대체로 후자의 평가가 적용되게 마련이다. [의혹의 밤]은 변호사 셰어와 배심원 데니스 퀘이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형적인 법정스릴러. 장르의 요구조건들은 두루 다 갖췄으되 진행이 더디고 긴박감이 떨어져 범작에 그쳤다. 빌리 크리스털이 뉴욕의 심장전문의로 등장하는 [메모리는 달콤씁쓸한(bittersweet) 코미디. 마지막 시퀀스로 등장하는 펠리니풍의 장례식 장면들이 그나마 볼 만하다는 평이다. [미스터 존스]는 정신과 상담의 레나 올린과 그녀의 환자 리처드 기어가 펼쳐보이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약간의 미스터리를 첨부하긴 했지만 역시 배우들의 아우라를 압도하기에는 플롯이나 스토리라인이 약하다.

할리우드에서 아카데미의 위력은 절대적이다. [포레스트 검프]로 오스카를 수상한 이후 에릭 로스에게는 노는 물이 달라진다. 현재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가들을 서브(sub)작가처럼 거느리며 시나리오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또다른 패착이 됐다. 브라이언 헬겔런드와 함께 쓴 [포스트맨]으로는 거의 조롱섞인 야유를 받았고, 리처드 라그라베네스와 함께 쓴 [호스 위스퍼러] 역시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한 것이다 만약 최신작 [인사이더]를 통하여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이지 못했더라면 에릭 로스의 오스카 수상은 그저 우연한 행운의 해프닝 정도로 평가절하되었을 것이다.

담배회사 내부의 고발자 러셀 크로와 그를 도우려는 다큐멘터리 TV프로그램의 프로듀서 알 파치노를 양대 축으로 내세운 [인사이더]는 근래에 보기드문 정공법의 드라마로서 일종의 고전적인 품격을 갖추고 있다. 참신한 플롯과 화려한 비주얼을 선호하는 최근의 경향에 비춰보면 다소 구닥다리처럼 느껴지는 드라마일지 몰라도, 캐릭터의 탐구와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미덕과 파워를 새삼스럽게 재확인시켜준 작품이다.어쩌면 에릭 로스의 진정한 필모그래피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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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74년 로버트 멀리건의 [니클 라이드](The Nickle Ride)
1979년 데이비드 로웰 리치의 [에어포트 79](Airport’79: Concord)
1987년 피터 예이츠의 [의혹의 밤](Suspect) ⓥ
1988년 헨리 윙클러의 [메모리](Memories of Me)
1993년 마이크 피기스의 [미스터 존스](Mr. Jones) ⓥ
1994년 로버트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 ★★
1997년 케빈 코스트너의 [포스트맨](Postman) ⓥ
1998년 로버트 레드퍼드의 [호스 위스퍼러](The Horse Whisperer) ⓥ
1999년 마이클 만의 [인사이더](Insider) ⓥ ★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수상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씨네21] 2000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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